족보
  • 백낙준(白樂濬)
  • 수원백씨(水原白氏),  출생~사망 : 1895 ~ 1985
5대국회 국회의장. 교육자, 종교인, 정치가. 호 용재(庸齋). 영어명 조지 백(George Paik). 재미시절 별명 백성빈(白成彬).

평안북도 정주에서 백영순(白永淳)의 4남으로 출생하였다. 1910년 봄 선천(宣川)의 신성중학교(信聖中學校)에 입학하여 교장 윤산온(尹山溫, McCune, G. S.) 목사의 보살핌과 감화를 크게 입었다. 중학생으로 신성소학교 교사를 겸직하게 되어 18세부터 일생을 배우며 가르치는 교육계에 투신하게 되었다.

1913년 중학을 마치고 중국에 유학, 천진 신학서원(新學書院)에서 3년 과정을 거쳤다. 1916년 미국에 건너가 중노동의 고학으로 파크대학, 프린스턴대학에서 역사학, 신학을 공부한 뒤, 1925년 예일대학 대학원에서 종교사 연구를 시작하여 1927년 '조선신교사 朝鮮新敎史'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뒤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후학지도를 하는 한편, 조선기독교서회 이사, 조선어학회 회원, 영국황실아주학회 한국지부 이사, 진단학회와 조선민속학회 발기인, 조선기독교청년회 이사 등 다채로운 활동을 하였다. 그뒤 외국에서 국제적 학술, 교육활동을 활발히 전개하다가 1939년 여름 귀국하자 종로경찰서에 연행되어 부득이 교직을 사임하게 되었으며 칩거생활 속에서 8.15를 맞았다. 이해 9월 서울대학교 전신인 경성대학 법문학부장, 한국교육위원회 자문위원으로 교육심의회 구성에 주력하며, 건국초 홍익인간(弘益人間)의 교육이념 정립에 기여하였다.

1946년 연희대학 초대총장에 취임하였으며, 1950년 5월 제2대문교부장관으로 6, 25를 만나 전시교육에 진력하였다. 그뒤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 제7, 8차 총회 한국대표, 대한교육연합회 회장을 역임한 뒤 1960년 7.29총선거가 실시될 때 무소속으로 입후보하여 전국 최다 득표로 당선, 참의원 의장에 선출되었다.

1961년 5.16으로 정계에서 교육계로 돌아와 연세대학교 명예총장으로 일하였다. 1969년부터 국토통일원 고문, 1980년 국정자문회의 운영위원으로 만년까지 학계, 교회, 사회, 국제관계 전반에 걸쳐 다채로운 활동을 하였다. 여러 대학에서 명예박사를 받았으며, 1970년 광복절에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1985년 향년 90세로 죽었으며, 사회장으로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묻혔다. 주요저서로는 '한국의 현실과 이상', '나의 인생관'(1971), '한국개신교사 1832∼1910'(1973), '나의 종강록'(1983)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