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자, 외교관. 평안남도 중화 출생. 1915년 평양 광성학교(光成學校)를 마치고 상경하여 1922년 연희전문학교 문과 졸업 후 공주 영명학교(永明學校) 교사로 재직하다가 도미하였다. 1925년 오하이오주 마운트 유니온대학을 졸업하고 이듬해 뉴욕 시라큐스대학에서 도서관학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하버드대학 대학원에 진학, 1930년 수료한 뒤 다음해 보스턴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에 머무르며 1934년까지 시라큐스대학에서 사학을 강의하였고 귀국하여 1936년 대영아시아학회 한국지부 부회장을 맡는 한편, 1944년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도서관장과 학감도 겸임하였다. 광복을 맞이하여 1945년 영자신문 '코리아 타임즈 The Korea Times'를 창간, 초대사장으로 활약하던 중 미군이 남한에 진주하자 주한미제24군단 사령관 하지(Hodge, J. W.) 중장의 특별보좌관으로 기용되어 정부수립에 이르도록 과도기체제 때 막후에서 유창한 영어실력으로 미군정을 주름잡다시피 하며 주요한 활동을 거의 전담하였다. 1945년 연희대학 교우회장으로 모교 재단이사에 취임하였고, 1946년 2월초 서울 천주교회에서 비상국민회의가 개최될 때 평안남도 대표로 선임되었으며, 비상국민회의가 과도정부 입법기관인 민주의원(民主議院)으로 발전적 변모를 이루게 하는데 공헌하였다. 주한국 총영사로 하지장군 정치고문이었던 랭던을 규탄한 윤치영(尹致暎)의 진정서사건으로 윤치영을 이승만(李承○)의 비서실장에서 물러나게 한 바도 있으며, 그해 6월 3일 이승만의 독립단일정부 수립의 '정읍발언(井邑發言)'이 있고 나서 정부수립을 촉진하는 뜻에서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가 이승만을 총재, 김구(金九)를 부총재로 하여 결성될 때 이시영(李始榮), 조성환(曺成煥), 오하영(吳夏英), 김성수(金性洙), 이범석(李範奭), 방응모(方應謨), 허정(許政), 윤보선(尹潽善), 김순도(金淳度), 노(盧)마리아와 더불어 10인협의원으로 선임되었던 바, 이러한 표면활동보다도 하지사령부가 민정으로 권력을 이양할 즈음 김규식(金奎植)의 좌우합작체제를 물리치고 단독정부 수립이 가능하도록 미군정청 경무부장 조병옥(趙炳玉), 수도경찰청장 장택상(張澤相)과 사전협의로 작용한 영향이 비상하였다. 정부수립을 전후로 1947년 연희대학후원회 부이사장, 재단법인 흥한재단 전무이사, 대한체육회 올림픽위원을 맡았으며, 이듬해 서울수렵회 초대회장과 국제사정연구회 부이사장, 농구협회 회장으로 활약하는 한편, 1949년 UN한국협회 이사장과 UN한국위원단 사무관으로 활약하다가, 1951년부터 순직할 때까지 7년간 주영국 특명전권공사로 런던에서 외교활동에 주력하였다. 1951년 파리 개최 제6차 UN총회 한국대표, 이듬해 영국왕 조지6세 장례식에 대통령 특사, 1953년 5월 엘리자베스2세여왕 대관식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특히 신익희(申翼熙) 국회의장을 수석으로 하는 한국의 사절단과 함께 처칠수상을 비롯한 16개 참전국 정상들과 괄목할 외교성과를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