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김성수(金性洙)
  • 울산김씨(蔚山金氏) 35세손,  출생~사망 : 1891 ~ 1955
교육가, 언론인, 정치가. 호는 인촌(仁村). 전라북도 고창 출신.

호남의 거부였던 김경중(金暻中)의 넷째아들로, 3세에 큰아버지인 김기중(金棋中)의 양자가 되었으며, 13세에 고광석(高光錫)과 혼인하였다. 1906년 전라남도 창평에서 송진우(宋鎭禹)와 함께 영어공부를 하였고, 1908년(18세)에 군산의 금호학교(錦湖學校)에 다녔다. 그해 10월 새 학문을 배우겠다고 송진우와 함께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와 긴조중학교(錦城中學校)를 거쳐, 1910년에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 입학, 1914년에 정경학부를 졸업하였다. '내 나라의 독립을 되찾기 위해서는 먼저 민족의 교육이 앞서야 한다.'고 생각하고, 1915년 4월 중앙학교(中央學校)를 인수하여 1917년 3월에 교장이 되었으며, 같은해에 경성직뉴주식회사(京城織紐株式會社)를 맡아 경영하였다. 1919년 1월부터 송진우, 현상윤(玄相允) 등과 함께 중앙학교 숙직실을 근거지로 독립운동을 펼 방책을 꾸며서, 그 뜻이 3, 1독립운동으로 결실되었다. 그해 10월, 민족의 산업을 일으키는 바탕으로 경성방직주식회사(京城紡織株式會社)를 세웠으며, 1920년 4월 동아일보사를 창립하였다. '동아일보'를 통해 1922년에는 물산장려운동(物産奬勵運動)을 폈으며, 1923년에 민립대학설립운동(民立大學設立運動)을 펴서 민족의식을 불러일으키고자 힘을 썼다. 1929년 2월 재단법인 중앙학원(中央學院)을 설립했다. 유럽과 미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나라의 문물과 교육실태를 두루 살피고 돌아와, 이듬해인 1932년 3월에는 어려운 형편에 있던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를 맡아 경영하여 교장이 되었다. 1945년 10월 미군정청 고문회의 의장에 취임하였고, 1946년 1월에는 복간된 '동아일보'의 사장을 다시 맡았으며, 같은 달에 송진우의 뒤를 이어 한국민주당의 수석총무(당수)가 되었다. 또, 그해 8월에는 보성전문학교를 기초로 고려대학교를 창립하였다. 1947년에는 반탁독립투쟁위원회(反託獨立鬪爭委員會)의 부위원장으로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지도하였고, 1949년 2월에 한국민주당과 대한국민당이 통합하여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이 창당되자 그 최고위원이 되었다. 1951년 5월 대한민국의 제2대부통령이 되었으나, 정부의 국회탄압사건에 항거하여 이듬해 5월 그자리에서 물러났다. 1953년 10월 피난지인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온 뒤에는 병석에서 호헌세력(護憲勢力)의 단결을 호소하다가 1955년 2월 18일 죽었다. 1955년 2월 24일 국민장으로 고려대학교 경내에 안장되었으나 지금은 경기도 남양주 군으로 이장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複章)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