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김수근(金壽根)
  • 영양김씨(英陽金氏) 28세손,  출생~사망 : 1931 ~ 1986
건축가. 세례명은 김바오로. 서울 출생.

1950년 경기공립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건축공학과에 진학하였으나 6.25를 맞아 2년만에 그만두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예술대학 미술학부 건축과에 입학, 신건축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재학중에는 '마쓰다, 히라다(松田平田)건축설계사무소'에 나가 건축실무를 배우기도 하였다. 1958년 대학을 졸업한 뒤에 동경대학대학원 도시공학과의 다카야마연구실(高山英華硏究室)에서 공부하여 1960년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이어 박사과정도 수료하였다.

1959년 동경예술대학 건축과를 졸업한 직후 남산 국회의사당 현상모집에 응모, 17점 가운데 일등으로 당선, 한국건축계에 화려하게 등장하였다(朴春嗚, 康炳基, 鄭炯, 鄭鍾泰 합작). 1961년 김수근 건축연구소를 개소하는 한편, 홍익대학 건축미술과에 전임강사로 취임하였다. 5월혁명 후에 워커힐 힐탑바에서 대담하고 상징적인 구조를 표현하여 개성 있는 작가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이 시기의 국내건축계는 아직 여명기의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이어 1960년대를 장식하는 자유센터, 오양빌딩(1964), 정동문화방송사옥(1965), 타워호텔(1967), 한국일보사옥, 홍릉과학기술연구소(1969)를 잇달아 발표, 그의 성가를 높였다. 또한, 국립부여박물관(1967)에서는 전통문제를 야기, 건축이 사회문제의 한 장르가 되는 부수적 효과를 얻어내기도 하였다.

그의 건축활동은 1966년 월간잡지 '공간'을 창간하면서 예술 전반으로 확대되었고, 불모지였던 건축언론 창달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 시기에 대표적 작품의 하나인 공간사옥(1977)과 마산성당(1979) 등을 비롯한 일련의 작품들을 설계하여 세계적인 건축가로서 부각되었고, 해외언론매체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뒤 그의 영역은 해외로 확대되어 일본, 미국, 이란, 수단, 인도, 카타르, 말레이시아 에까지 작품을 세울 수 있었다. 또한, 이즈음 서울아시아경기대회와 서울올림픽대회 시설의 중요시설들도 설계하였다. 1980년대 그의 파트너쉽이 활성화되면서 그는 또 다른 대규모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