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심의석(沈宜錫)
  • 청송심씨(靑松沈氏),  출생~사망 : 1859 ~ 1927
건축가. 서울에서 태어나 정동(貞洞)에서 거의 모든 생애를 보낸 한학(漢學)을 배운 세대이다. 그에게 있어서 정동파, 미국 감리교 선교사들과의 만남은 서구건축에 눈뜨는 계기가 되었으며, 따라서 '정동구락부'를 중심으로 한 서구문명에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첫번째 신건축 참여는 배재학당(1887)으로 단층 벽돌조 건물의 교사(校舍)는 그가 처음 벽돌건축에 참여한 경험을 가지게 되는 일이었다. 이어 시병원(施病院, 1890)을 건립하였으며, 1896∼1897년에는 러시아의 건축가인 사바진(Sabatin, A. I. S.)의 설계에 따라 서대문 영은문(迎恩門) 자리에 기념할만한 석조건조물로서 독립문을 세웠다. 따라서 이미 서양인들을 통하여 서양건축술을 터득하여 학교, 병원 등 각종 건축물의 신축에도 계속 참여하였다. 그 경험으로 정동제일교회(貞洞第一敎會)의 건축에 참여하였다. 정동교회는 1895년에 착공, 1898년 10월에 준공되었는데, 3층의 벽돌조 종탑(鐘塔)이 있어 이의 건조는 건축기술사적으로 독립문의 석조구조물과 함께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밖에 서양건축물로서 정동 이화학당본관(Main Hall, 1897∼1899), 상동교회(尙洞敎會, 1900∼1901)가 있다. 반면 전통건축에의 참여로서 파고다공원내의 팔각정(八角亭, 1897), 조선호텔내의 원구단(○丘壇)과 황궁우(皇穹宇), 그리고 석고단(石鼓壇, 1901. 11.), 광화문 소재 기념비각(紀念碑閣)(1902. 9.) 등이 있다. 또, 당시의 선각자 이채연(李采淵), 남궁억(南宮檍)과 함께 서울을 개혁하는 데 선구적 역할을 하였으며, 이때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이며 국내 최초의 원형극장인 협률사(協律社, 1902. 8.)도 그에 의하여 세워졌다. 그밖에 이화여고 프라이홀(Fry Hall) 자리에 있던 손탁(孫鐸) 호텔(1902∼1903), 덕수궁 내의 석조전(石造殿, 1909) 등이 있다. 한일합방 후에는 관직에도 올라, 개화기의 선각자 유길준(兪吉濬)과 함께 참사(參事)가 되어 참사제도가 폐지된 1919년까지 내부아문(內部衙門)의 기사직(技師職)에 있었다. 우리나라 전통건축의 마지막 세대인 동시에 개화기 신건축의 첫세대로서, 또 그 시대의 선각자로서 활동하였던 도시건설자, 건축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