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의 여류문인. 외교활동가. 초명은 덕원(德媛). 호는 소파(小坡) 또는 수구(隨鷗). 아버지는 당시 관리였던 수양산인 경금옹(慶今翁)이라고 자호한 오시선(吳時善)이다.
경상북도 의성에서 태어나 9세부터 남자복장을 하고 사숙(私塾)에 다녀 얼마 안가 시를 지을 줄 알았다고 한다. 1898년에는 의성과 이웃 두 군에서 실시하는 백일장에서 수방(首榜)을 차지하였다. 1902년 14세 때 공금유용의 죄로 수감된 아버지의 죄를 용서받고자 단신 상경하여 당시의 판서 김종한(金宗漢), 민영선(閔泳璇) 등에게 읍소하면서 부녀의 결연과 사제의 의리를 맺으면서 아버지를 구하였다. 이때부터 시회에 출입하기 시작하다가 당시의 시회인 구로회(九老會)에까지 출입하며 시로써 총애를 받았다. 이토(伊藤博文)에게도 접근하여 그 소개장을 가지고 1908년 신명여학교(新明女學校)를 건립한다고 20세 때 일본에 건너가 사교계에 어울리면서 4년간 학교건립기금을 기부받으며 기천원을 모금하여 돌아왔다고 한다. 24세 때 당시 동경에 있던 한국공사대리 신해영(申海永)과 약혼하였으나 혼인 직전 신해영이 죽자 4년간 신명, 숭신(崇信), 공옥(攻玉) 등 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6년 28세 때 학생복장을 하고 중국 상해에 들어가 시서(詩書)활동을 하면서 '신신보사 申新報社'에 시와 글씨를 게재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한편 양계초(梁啓超) 등 중국 명사와 사귀었다. 1918년 당시 북경 에가 있던 윤명은(尹命殷)과 혼인하여 귀국하고는 6년간 병든 몸으로 요양하며, 기독교에 들어가 세례를 받았다. 명신여학교를 세우고 가르쳤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1929년에 그의 청으로 아버지가 시를 모아 '소파여사시집 小坡女士詩集'을 발간하였다. 죽은 연대는 확실치 않고, 1929년의 자기 서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41세 이후가 될 것이다.
경상북도 의성에서 태어나 9세부터 남자복장을 하고 사숙(私塾)에 다녀 얼마 안가 시를 지을 줄 알았다고 한다. 1898년에는 의성과 이웃 두 군에서 실시하는 백일장에서 수방(首榜)을 차지하였다. 1902년 14세 때 공금유용의 죄로 수감된 아버지의 죄를 용서받고자 단신 상경하여 당시의 판서 김종한(金宗漢), 민영선(閔泳璇) 등에게 읍소하면서 부녀의 결연과 사제의 의리를 맺으면서 아버지를 구하였다. 이때부터 시회에 출입하기 시작하다가 당시의 시회인 구로회(九老會)에까지 출입하며 시로써 총애를 받았다. 이토(伊藤博文)에게도 접근하여 그 소개장을 가지고 1908년 신명여학교(新明女學校)를 건립한다고 20세 때 일본에 건너가 사교계에 어울리면서 4년간 학교건립기금을 기부받으며 기천원을 모금하여 돌아왔다고 한다. 24세 때 당시 동경에 있던 한국공사대리 신해영(申海永)과 약혼하였으나 혼인 직전 신해영이 죽자 4년간 신명, 숭신(崇信), 공옥(攻玉) 등 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6년 28세 때 학생복장을 하고 중국 상해에 들어가 시서(詩書)활동을 하면서 '신신보사 申新報社'에 시와 글씨를 게재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한편 양계초(梁啓超) 등 중국 명사와 사귀었다. 1918년 당시 북경 에가 있던 윤명은(尹命殷)과 혼인하여 귀국하고는 6년간 병든 몸으로 요양하며, 기독교에 들어가 세례를 받았다. 명신여학교를 세우고 가르쳤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1929년에 그의 청으로 아버지가 시를 모아 '소파여사시집 小坡女士詩集'을 발간하였다. 죽은 연대는 확실치 않고, 1929년의 자기 서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41세 이후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