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이응로(李應魯)
  • 전의이씨(全義李氏),  출생~사망 : 1904 ~ 1989
한국화가. 호는 죽사(竹史), 고암(顧菴). 충청남도 홍성출생. 1924년 서울로 올라와 김규진(金圭鎭)에게 묵화를 사사하여 그해부터 조선미술전람회(鮮展)에 묵죽(墨竹)을 비롯하여 묵매(墨梅), 묵란(墨蘭) 등 사군자의 그림으로 거듭 입선하고, 1938년부터는 수묵담채의 사실적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1944년까지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 계속 입선과 특선에 오르며 전통화단에 뚜렷이 진출하였다. 1938년 새로운 그림수업을 위하여 일본에 건너가 동경에 머무르면서 가와바타화학교(川端畵學校)와 혼고회화연구소(本鄕繪畵硏究所)에서 일본화법과 양화의 기초를 익히며 그림의 기량을 넓혔다. 그러면서 1939년부터 1944년까지 동경의 일본화원전(日本畵院展)에 참가, 입선과 특선을 하는 작품활동을 보였다. 1945년 8, 15광복 직전에 귀국하여 배렴(裵濂), 장우성(張遇聖), 김영기(金永基), 이유태(李惟台), 조중현(趙重顯) 등과 전통회화의 새로운 방향을 탐구한다는 모임으로 '단구미술원(檀丘美術院)'을 조직하여 1946년부터 동인전을 가졌고, 조선미술가협회 상임위원이 되기도 하였다. 그 시기부터 현대적 수묵화작업으로 자연풍경과 향토적인 인물풍경 또는 동물, 새 등의 소재를 주제로 삼은 독특한 붓놀림의 창작성을 시도하기 시작하여 1950년대의 분방하고 자유로운 독자풍으로 이어졌다. 1957년 조선일보사 주최 제1회 현대작가미술전에 참가하고, 다음해에도 초대를 받는 등 현대적인 작가상을 스스로 확립하다가, 1958년 국제적 도전으로 부부관계였던 제자 화가 박인경(朴仁京)과 더불어 독일을 거쳐 프랑스의 파리에 정착, 그간의 수묵화 한계를 과감히 벗어난 서구(西歐) 미학의 콜라즈(collage)로 파격적인 변신을 나타내었다. 서울에서 가져간 화선지 외에 버려진 모든 종이를 재질삼아 콜라즈로 형상시키고 바탕도 무엇이든 이용한 그 실험적인 조형행위는 먹물 또는 은근한 색상 부여로 동양적인 정신성과 은밀한 형상창조로 이내 국제적 평가와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 작품들은 1965년 무렵까지 '콩포지시옹(Composotion)'이라는 단일명제가 붙여졌다. 파리와 독일, 스위스, 덴마크 등지의 여러 화랑 및 미술관에서 그 작품들이 초대전시되었다. 그뒤의 약 10년간을 작가 스스로 '사의적 추상시기(寫意的抽象時期)', 그리고 그에 이은 1980년대 초기까지를 '서예적 추상시기(書藝的抽象時期 : 흔히 문자추상이라 한다.)'로 작화(作畵) 의도와 조형적 표상성의 창조적 변화와 집중성을 나타내었다. 그 모두가 동양적 표현정신과 밀착된 특질로서 국제적 위상을 실현시켰다. 그러나 6, 25 때 월북한 아들 관계로 베를린에서 북한 공작원과 만난 것이 '반공법'에 위반되어 1967년 서울로 유인된 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다가 1969년 특별사면되어 파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1977년에도 파리에서 피아니스트 백건우(白建宇)와 영화배우 윤정희(尹靜姬) 부부의 북한납치미수사건의 배후로 몰려 곤욕을 치른 뒤, 남한과의 관계를 단절하다가 1983년 프랑스에 귀화하였다. 그리고 1981년부터는 남한의 민주화투쟁을 주제로 삼은 '시위 군중' 소재의 대대적인 수묵화 연작에 주로 열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