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화가. 호는 무호(無號), 초호는 수재(壽齋)이며, 낙관(落款)에는 이복(李福) 이라 쓰기도 하였다. 어려서 조석진(趙錫晋)과 안중식(安中植)에게 전통화법을 배운 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1918년 동경미술학교 일본화과에 입학하여 1923년 졸업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서화협회(書畵協會) 회원으로 1921년 첫 협회전람회부터 줄곧 참가하였고, 1922∼1929년까지는 조선미술전람회에도 출품하였다. 미술학교에 유학한 새로운 회화의식으로 1920년대의 청년작가 시기에는 근대적인 일본화풍과 서양화법에서 자극을 받은 현실적 시각 및 정감의 사실적인 채색표현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1930년 무렵부터는 전통적 한국화 취향으로 돌아가 수묵담채의 산수화와 화조화를 온건한 필치로 그렸다. 그 작풍(作風)이 뚜렷한 독자적 경지는 아니었다 해도 당시로서는 새로운 표현감각의 전통화가로 평가되었다. 죽기 직전인 1940년 조선미술관(吳鳳彬 운영)이 관계사회의 원로와 안목인사들의 추천 및 논의를 거쳐 선정한 '10명가산수풍경화전(十名家山水風景畵展)'을 개최할 때 이한복도 거기에 들었다. 서울의 휘문(徽文), 보성(普成), 진명(進明) 등 여러 학교에서 미술교사를 역임하였고, 고서화(古書畵)의 감식안목이 높았다. 일찍부터 글씨도 즐겨 오창석체(吳昌碩體)의 전서(篆書)를 잘 썼고, 조선미술전람회에 글씨와 그림을 같이 출품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1925년 서울 기독교청년회관(YMCA)에 미술과가 설치되어 남녀 연구생을 모집하였을 때에는 동양화부 실기를 맡아 지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