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화가. 호는 남농(南農). 전라남도 진도 출생. 19세기 남종화의 대가인 허련(許鍊)의 손자이며, 직업화가였던 허형(許瀅)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집안 전래의 그림 재능을 나타냈으나 화가생활의 빈궁함을 대물림하지 않게 하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목포상업전수학원에 들어가 상업을 공부하였다. 그런 가운데에도 타고난 그림 자질이 독학으로 발휘되어, 1930년 조선미술전람회(鮮展)동양화부에 수묵담채의 사실적 풍경화가 첫 입선한 뒤로, 1944년까지 연달아 입선과 특선에 오르면서 전통화단에 진출하였다. 1940년의 수묵채색화 '금강산 보덕굴(普德窟)'과 같은 무렵의 '산촌(山村)'은 현존하는 광복 전의 대표작이다.
광복 후에는 그 전부터 지니고 있었던 경쾌한 붓놀림과 현실감의 담채 및 농채의 기법으로 전통적인 산수화의 의취(意趣)와 현실적 시각의 표현감정을 특질적으로 조화시키는 수법으로 시골 풍정을 주제삼은 '4월 산촌록(山村錄)'(1948), '산사(山寺)'(1955), '운림동 소견(雲林洞 所見)'(1957), 그밖에 무한한 향토애의 계절적인 산수풍경화를 연작하였다.
1952년부터는 국전(國展)에 참가하여 추천작가, 초대작가, 심사위원을 역임하면서 작가적 명성을 굳혔고, 1957년 김기창(金基昶), 이유태(李惟台), 김영기(金永基), 김정현(金正炫), 박내현(朴崍賢), 천경자(千鏡子) 등과 중진 한국화가단체 백양회(白陽會) 창립에 참가하고, 1970년대 중엽까지 지속된 그 연례회원작품전에 출품하였다.
18세 때부터 목포에 정착한 이래 그곳을 떠나지 않은 철저한 향토고수의 작품활동은, 역시 진도 출신의 같은 허씨가문 연장자로 1920년대 이후 호남을 대표한 남종화풍의 대가였던 광주(光州) 정착의 백련(百鍊)과 더불어 호남전통화파의 상징적 두 고봉(高峯)으로 일컬어졌다.
1979년 목포 성옥문화상(聲玉文化賞)을 받았으며, 1982년 은관문화훈장 및 목포시민상을 수상하였다. 1983년 대한민국예술원 원로회원에 피선되었으며, 그리고 1985년 전라남도 무등문화상을 수상하였다.
어려서부터 집안 전래의 그림 재능을 나타냈으나 화가생활의 빈궁함을 대물림하지 않게 하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목포상업전수학원에 들어가 상업을 공부하였다. 그런 가운데에도 타고난 그림 자질이 독학으로 발휘되어, 1930년 조선미술전람회(鮮展)동양화부에 수묵담채의 사실적 풍경화가 첫 입선한 뒤로, 1944년까지 연달아 입선과 특선에 오르면서 전통화단에 진출하였다. 1940년의 수묵채색화 '금강산 보덕굴(普德窟)'과 같은 무렵의 '산촌(山村)'은 현존하는 광복 전의 대표작이다.
광복 후에는 그 전부터 지니고 있었던 경쾌한 붓놀림과 현실감의 담채 및 농채의 기법으로 전통적인 산수화의 의취(意趣)와 현실적 시각의 표현감정을 특질적으로 조화시키는 수법으로 시골 풍정을 주제삼은 '4월 산촌록(山村錄)'(1948), '산사(山寺)'(1955), '운림동 소견(雲林洞 所見)'(1957), 그밖에 무한한 향토애의 계절적인 산수풍경화를 연작하였다.
1952년부터는 국전(國展)에 참가하여 추천작가, 초대작가, 심사위원을 역임하면서 작가적 명성을 굳혔고, 1957년 김기창(金基昶), 이유태(李惟台), 김영기(金永基), 김정현(金正炫), 박내현(朴崍賢), 천경자(千鏡子) 등과 중진 한국화가단체 백양회(白陽會) 창립에 참가하고, 1970년대 중엽까지 지속된 그 연례회원작품전에 출품하였다.
18세 때부터 목포에 정착한 이래 그곳을 떠나지 않은 철저한 향토고수의 작품활동은, 역시 진도 출신의 같은 허씨가문 연장자로 1920년대 이후 호남을 대표한 남종화풍의 대가였던 광주(光州) 정착의 백련(百鍊)과 더불어 호남전통화파의 상징적 두 고봉(高峯)으로 일컬어졌다.
1979년 목포 성옥문화상(聲玉文化賞)을 받았으며, 1982년 은관문화훈장 및 목포시민상을 수상하였다. 1983년 대한민국예술원 원로회원에 피선되었으며, 그리고 1985년 전라남도 무등문화상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