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화가. 자는 중일(仲一). 호는 관재(貫齋), 면소(○巢), 벽허자(碧虛子). 이름은 도영(○穎)으로 쓰기도 하였다. 서울 태생으로 18세 때에 조석진(趙錫晋)과 안중식(安中植)의 문하생이 되어 전통화법을 폭넓게 수업하였다. 특히, 안중식의 화풍을 주로 이어받아 인물, 영모(翎毛), 기명절지(器皿折枝)의 화제(畵題)에서 온건하고 자유로운 필력을 발휘하였다. 1911년 은사 조석진과 안중식이 중심적 교수진이 된 서화미술회(書畵美術會) 강습소가 개설되자 그림 전공의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1918년 동연배의 화우였던 동경미술학교 서양학과 출신 고희동(高羲東)이 앞장서서 서화협회(書畵協會) 조직에 나서자 조석진과 안중식을 위시한 13인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가하였고, 1920년대 이후 고희동과 더불어 서화협회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1921년 첫 서화협회전람회(약칭 協展)를 개최함과 동시에 '서화협회회보 書畵協會會報'에 '동양화의 연원(淵源)'과 '동양화의 강구(講究)'를 연재물로 집필하였고, 1923년 미술학교를 목표한 3년 수업과정의 서화학원(書畵學院)을 서화협회가 개설하면서 동양화부 지도를 맡았다. 그밖에 1922년부터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대규모로 주최한 조선미술전람회의 동양화부 심사원을 수차 역임하였다. 그러한 많은 화단 활동에 비하여 정작 그의 그림은 명성에 부합되는 높은 경지의 특질성이나 개성적인 작풍으로 발전하지 못하여 전해지는 역작도 많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