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가. 서울 출생. 1927년부터 조선미술전람회(약칭 鮮展)에 인물, 풍경 소재의 유화로 거듭 입선과 특선에 몇 번 오르며 양화계에 진출하였다. 한때 동경에 가서 수업하기도 하였으나 시종 독학하였으며, 수법은 보편적 사실주의 테두리에서 견실성을 보였다. 1940년 조선미술전 입선작 '대합실 한 구석'의 인물군상은 일제 밑에서 살 길을 잃고, 외지 북간도 등지로 떠나야 했던 한 가족의 참담한 처지를 주제로 삼은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1945년 광복 직후에는 조선미술건설본부(중앙위원장 高羲東) 서기장이 되었다가 정치적으로 좌익편에 서면서 조선 조형예술동맹 및 조선미술동맹 간부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그 시기에는 본분의 그림활동은 거의 없었던 반면, 서울신문사가 발행하던 월간잡지 '신천지 新天地'의 편집인 위치에 있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조선미술동맹이 와해되자 사상적 전향을 표명하였으나, 1950년 6, 25 발발 직후 서울에 북한체제 영합의 남조선미술동맹이 결성되자, 다시 그 간부로 나섰다가 결국 북으로 넘어갔다. 그뒤 북한에서는 수채화, 유화, 펜화를 비롯하여 각종 출판물의 삽화와 그림책의 원화제작 등 다채로운 활약을 하였다. 1960년 무렵부터는 조선화(전통회화)에도 손을 대면서 정치적인 주제화들 외에 역사화, 풍경화, 인물화 등의 작품활동을 하였다. 그밖에 1952년과 1962∼1963년 같은 월북화가인 손영기(孫英奇)와 공동작업으로 황해도의 안악1∼3호분 고분벽화를 모사한 사실이 확인되어 있다. 1976년 죽을 때까지 만수대창작사 조선화창작단 소속으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