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엄복동(嚴福童)
  • 영월엄씨(寧越嚴氏),  출생~사망 : 1892 ~ 1951
사이클선수.

1892년 서울에서 엄선양과 어머니는 김씨(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경기도 평택의 자전거 판매상인 일미상회에서 배달점원으로 일하던 중 1913년 4월 13일 경성일보사(京城日報社)와 매일신보사(每日申報社)가 인천(12일), 용산(13일), 평양(27일) 등에서 공동주최한 전조선 자전차경기대회에서 우승하였다. 특히, 27일 평양 역전광장에서 한국인 2명과 일본인 4명으로 실시된 조, 일일류선수 연합경기에서는 엄복동과 황수복(黃壽福)이 각각 1위와 3위를 차지하여, 당시 일제의 침략야욕 앞에 국운이 쇠퇴해가던 상황에서 국민들의 환호와 감격이 절정에 달하였다.

그뒤 1922년 5월 31일부터 2일간 평양 윤업회(輪業會)주최로 광성고등보통학교(光成高等普通學校)운동장에서 열린 전조선자전차경기대회에서도 일본선수들을 물리치고 우승하였다. 1922년에도 전 조선 자전거 대회에서 우승하자, 일본 심판들은 1920년 경성시민대운동회에서 날이 저물었다며 경기를 중단시키는 등 비상식적인 판정을 내렸다. 이에 격분한 엄복동은 본부석으로 뛰어든 뒤, 우승기를 잡고 꺾어버림으로써 항의했다. 이 일로 일본 관객과 조선관객사이에는 다툼이 일어났을 정도로 조선 사람들에게 엄복동은 영웅이었다. 1928년 6월 전국운수조합 대회에도 참여했으며,1932년 4월에도 40세의 나이에 전 조선 남녀자전거대회 1만m 경주에 참여하여 당당히 우승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초까지 선수생활을 하다가 은퇴하고 말년에 극히 불우한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광복 후 집이 없어 경기도 동두천과 연천 부근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던 중 1951년 6.25사변 당시 동두천 부근의 어느 야산에서 비행기 폭격으로 숨졌다.

엄복동은 비록 자전거경기라는 제한된 부분이었지만, 국권상실기의 암울한 시대에 그의 우승으로 인한 민족적 일체감과 자긍심은 대단하여 국민적 영웅이라는 칭송까지 받게 되었다. 당시 어린이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뿐 아니라 '하늘에 안창남, 땅에 엄복동 '이란 유행어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대한사이클연맹은 불우한 처지에서도 사이클선수로 대성하여 민족의 긍지와 자부심을 일깨워준 그의 기상을 드높이기 위해서 1977년부터 1999년까지 그를 기념하는 엄복동배 전국사이클경기대회를 열었다.

문화재청은 2010년 8월 24일 엄복동 자전거를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제466호로 지정하였다. 엄복동이 사용한 자전거는 영국의 자전거 및 모터사이클 제조 회사 러지휘트워스(Rudge-Whitworth)가 1910년에서 1914년 사이에 만들어 일본에 수출한, 한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자전거로서 문화재청은 문화재 등록 당시 '전면 상표의 일련번호 1065274를 통해 세계적인 희귀 기종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1920년 경기 당시 일미상회가 소유하고 있던 이 자전거를 엄복동이 우승한 후 증여받아 선수 생활 기간에 사용하다가 후배에게 물려주었으며, 이후 자전거를 물려받은 선수가 한국전쟁 때 들쳐메고 피난했다는 일화도 전해질 정도로 엄복동의 자전거는 한민족의 수난을 같이 한 자전거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자전거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기까지 하웅용 한국체육대학교 교수의 공이 컸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제조 회사가 1930년대 폐업하고 관련 인물들도 모두 세상을 떠난 상태에서 영국 국립 자전거 박물관의 스콧퍼드 로런스(Scotford Lawrence)가 생산 시기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였고, 대한민국 자전거 원로들의 증언을 통해 이 자전거가 실제 엄복동이 사용했던 자전거임을 확실히 할 수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