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류시인. 초명은 기선(基善), 천주교의 영세명은 베로니카. 황해도 장연 출신. 아버지는 계일(啓一)이고, 어머니는 김홍기(金鴻基)이다.
1. 학력, 경력
아버지가 죽자 1919년 가족들과 함께 서울로 이사하여 진명보통학교에 입학, 5학년 때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34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문단 친우로는 모윤숙(毛允淑), 김광섭(金珖燮), 이헌구(李軒求) 등이 있다. 홍해성(洪海星), 유치진(柳致眞), 김진섭(金晉燮), 서항석(徐恒錫) 등이 주관하여 결성한 극예술연구회(劇藝術硏究會)에 참여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1938년 체호프(Chekhov, A. P.)의 '앵화원 櫻花園'을 공연할 때 모윤숙과 출연하여 아냐역을 맡기도 하였다. 이화여자전문학교 졸업 직후 조선중앙일보사(朝鮮中央日報社) 학예부 기자로 근무하다가 3년 뒤 신문사를 사임하고 잠시 북간도의 용정(龍井)과 연길(延吉) 등지를 여행하고 나서, '여성 女性'의 편집부와 매일신보사(每日新報社) 학예부 기자로 근무하였다. 8, 15광복 후에는 서울신문사 문화부와 부녀신문사 편집차장을 역임하였다. 6, 25남침 당시 피난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임화(林和) 등이 주도하는 문학가동맹(文學家同盟)에 참여한 혐의로 수복 후 구속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어 중앙방송국 촉탁으로 있으면서 서라벌예술대학에 출강하는 한편,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에 있으면서 '이화 70년사'를 집필하기도 하였다.이 무렵 극도로 쇠약해져 재생불능성 뇌빈혈로 1957년에 죽었다.
2. 작품과 그 경향
노천명의 시작 활동은 이화여자전문학교 재학 때부터 시작되었다.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시절에도 당시 일본에서 간행된 어린이 잡지에 응모하여 입상하는 등 시재(詩才)가 뛰어나, 시를 지어 학우들 앞에서 낭독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화여자전문학교 시절에 발표한 시는 '고성허(古城墟)에서'(뒤에 滿月臺로 개작)외 5편을 '이화' 지에, '밤의 찬미(讚美)' 외 2편을 '신동아' 에, '제석 除夕'을 '신가정 新家庭'에 발표하였다. 졸업 후 1935년에는 '시원 詩苑' 동인으로 시 '내 청춘(靑春)의 배는'(1935. 2.)을 발표하였다. 노천명을 '사슴의 시인'이라 하는데, '사슴'은 1938년 간행된 제1시집 '산호림 珊瑚林'에 실린 49편 중에서 대표작의 하나이다. 여기에는 또한 '자화상 自畵像', '귀뚜라미', '생가 生家', '장날', '연잣간', '돌아오는 길' 등의 작품이 널리 읽혀지고 있다. 제2시집 '창변 窓邊'은 1945년 매일신보사에서 간행되었는데 '남사당 男寺黨', '춘향 春香', '푸른 오월', '장미 薔薇' 등을 주요작품으로 꼽을 수 있다. 고독과 향수, 소박하면서도 여성특유의 섬세한 정감의 세계, 이것이 그 초기시집 '산호림'과 '창변'의 시편들에 일관하는 특색이 되고 있다. 이때의 시세계는 망향의 정을 담은 향토적이고 토속적인 풍물시들을 잘 절제된 감정으로 투영시켜 표현하고 있다. 그의 후기 시세계로 나타나는 제3시집 '별을 쳐다보며'(1953)는 6, 25사변 당시 옥고를 치른 체험을 바탕으로 쓴 옥중시 '영어(囹圄)에서' 외 20편과 그밖에 '설중매 雪中梅', '검정나비', '그리운 마을', '별을 쳐다보며'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때의 시경향은 감옥에서의 수난체험과 거기서 오는 현실도피적인 시, 반공애국시, 그리고 고향에의 향수 등이 담겨 있다. 제4집 '사슴의 노래'는 그의 사후 1958년 한림사(翰林社)에서 간행되었는데, 수편의 미발표 유작시도 실려 있다. 대표시를 들면 '유월(六月)의 언덕', '비련송 悲戀頌', '사슴의 노래', '내 가슴에 장미(薔薇)를', '나에게 레몬을'을 꼽을 수 있다.
3. 평가 및 문학작품
그의 시는 전통적인 여류시의 맥락을 현대적으로 계승하는 한편, 모순으로서의 인생, 고독과 비극으로서의 생의 본질을 끊임없이 응시하고 그것을 견디어나가는 자세를 보여줌으로써 당대 여류시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려놓았다고 볼 수 있다. 산문집으로는 수필집 '산딸기'(1948)와 '나의 생활백서(生活白書)'(1954), '여성서간문독본 女性書簡文讀本'(1955) 등이 있다. 이밖에 '사월이'(1939), '하숙 下宿', '외로운 사람들' 등 몇 편의 소설과 평론이 있다.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에 있는 묘지의 묘비는 김충현(金忠顯)의 글씨로, 시 '고별 告別'의 일절이 새겨져 있다.
1. 학력, 경력
아버지가 죽자 1919년 가족들과 함께 서울로 이사하여 진명보통학교에 입학, 5학년 때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34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문단 친우로는 모윤숙(毛允淑), 김광섭(金珖燮), 이헌구(李軒求) 등이 있다. 홍해성(洪海星), 유치진(柳致眞), 김진섭(金晉燮), 서항석(徐恒錫) 등이 주관하여 결성한 극예술연구회(劇藝術硏究會)에 참여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1938년 체호프(Chekhov, A. P.)의 '앵화원 櫻花園'을 공연할 때 모윤숙과 출연하여 아냐역을 맡기도 하였다. 이화여자전문학교 졸업 직후 조선중앙일보사(朝鮮中央日報社) 학예부 기자로 근무하다가 3년 뒤 신문사를 사임하고 잠시 북간도의 용정(龍井)과 연길(延吉) 등지를 여행하고 나서, '여성 女性'의 편집부와 매일신보사(每日新報社) 학예부 기자로 근무하였다. 8, 15광복 후에는 서울신문사 문화부와 부녀신문사 편집차장을 역임하였다. 6, 25남침 당시 피난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임화(林和) 등이 주도하는 문학가동맹(文學家同盟)에 참여한 혐의로 수복 후 구속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어 중앙방송국 촉탁으로 있으면서 서라벌예술대학에 출강하는 한편,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에 있으면서 '이화 70년사'를 집필하기도 하였다.이 무렵 극도로 쇠약해져 재생불능성 뇌빈혈로 1957년에 죽었다.
2. 작품과 그 경향
노천명의 시작 활동은 이화여자전문학교 재학 때부터 시작되었다.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시절에도 당시 일본에서 간행된 어린이 잡지에 응모하여 입상하는 등 시재(詩才)가 뛰어나, 시를 지어 학우들 앞에서 낭독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화여자전문학교 시절에 발표한 시는 '고성허(古城墟)에서'(뒤에 滿月臺로 개작)외 5편을 '이화' 지에, '밤의 찬미(讚美)' 외 2편을 '신동아' 에, '제석 除夕'을 '신가정 新家庭'에 발표하였다. 졸업 후 1935년에는 '시원 詩苑' 동인으로 시 '내 청춘(靑春)의 배는'(1935. 2.)을 발표하였다. 노천명을 '사슴의 시인'이라 하는데, '사슴'은 1938년 간행된 제1시집 '산호림 珊瑚林'에 실린 49편 중에서 대표작의 하나이다. 여기에는 또한 '자화상 自畵像', '귀뚜라미', '생가 生家', '장날', '연잣간', '돌아오는 길' 등의 작품이 널리 읽혀지고 있다. 제2시집 '창변 窓邊'은 1945년 매일신보사에서 간행되었는데 '남사당 男寺黨', '춘향 春香', '푸른 오월', '장미 薔薇' 등을 주요작품으로 꼽을 수 있다. 고독과 향수, 소박하면서도 여성특유의 섬세한 정감의 세계, 이것이 그 초기시집 '산호림'과 '창변'의 시편들에 일관하는 특색이 되고 있다. 이때의 시세계는 망향의 정을 담은 향토적이고 토속적인 풍물시들을 잘 절제된 감정으로 투영시켜 표현하고 있다. 그의 후기 시세계로 나타나는 제3시집 '별을 쳐다보며'(1953)는 6, 25사변 당시 옥고를 치른 체험을 바탕으로 쓴 옥중시 '영어(囹圄)에서' 외 20편과 그밖에 '설중매 雪中梅', '검정나비', '그리운 마을', '별을 쳐다보며'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때의 시경향은 감옥에서의 수난체험과 거기서 오는 현실도피적인 시, 반공애국시, 그리고 고향에의 향수 등이 담겨 있다. 제4집 '사슴의 노래'는 그의 사후 1958년 한림사(翰林社)에서 간행되었는데, 수편의 미발표 유작시도 실려 있다. 대표시를 들면 '유월(六月)의 언덕', '비련송 悲戀頌', '사슴의 노래', '내 가슴에 장미(薔薇)를', '나에게 레몬을'을 꼽을 수 있다.
3. 평가 및 문학작품
그의 시는 전통적인 여류시의 맥락을 현대적으로 계승하는 한편, 모순으로서의 인생, 고독과 비극으로서의 생의 본질을 끊임없이 응시하고 그것을 견디어나가는 자세를 보여줌으로써 당대 여류시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려놓았다고 볼 수 있다. 산문집으로는 수필집 '산딸기'(1948)와 '나의 생활백서(生活白書)'(1954), '여성서간문독본 女性書簡文讀本'(1955) 등이 있다. 이밖에 '사월이'(1939), '하숙 下宿', '외로운 사람들' 등 몇 편의 소설과 평론이 있다.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에 있는 묘지의 묘비는 김충현(金忠顯)의 글씨로, 시 '고별 告別'의 일절이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