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본명은 이양희(李樑熙), 아호는 고월(古月). 대구 출신. 1920년에 이장희(李樟熙)로 개명하였으나 필명으로 이장희(李章熙)를 사용한 것이 본명처럼 되었다. 아버지는 이병학(李炳學)이며, 어머니는 박금련(朴今連)이다.
대구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경도중학(京都中學)을 졸업하였다. 문단의 교우관계는 양주동(梁柱東), 유엽(柳葉), 김영진(金永鎭), 오상순(吳相淳), 백기만(白基萬), 이상화(李相和) 등 극히 제한되어 있었고, 세속적인 것을 싫어하여 고독하게 살다가 1929년 11월 대구 자택에서 음독자살하였다.
작품활동은 1924년 '금성 金星' 5월호에 '실바람 지나간 뒤', '새 한마리', '불놀이', '무대(舞臺)', '봄은 고양이로다' 등 5편의 시작품과 톨스토이(Tolstoi)원작의 번역소설 '장구한 귀양'을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신민(新民)', '여명(黎明)', '신여성(新女性)', '여시(如是)', '생장(生長)', '조선문단(朝鮮文壇)'에 '동경(憧憬)', '석양구(夕陽丘)', '청천(靑天)의 유방(乳房)', '하일소경(夏日小景)', '봄철의 바다' 등 30여편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의 시는 사후 1951년 청구출판사(靑丘出版社)에서 간행된 백기만편의 '상화(尙火)와 고월(古月)'에 실린 11편만 전해지다가 1970년대 초반부터 그의 시연구가 본격화되면서 '봄과 고양이'(李章熙全集, 문장사, 1982)와 '봄은 고양이로다'(李章熙全集, 評傳, 문학세계사, 1983) 등 두권의 전집에 그의 유작이 총정리되었다.
이장희의 전 시편에 나타난 시적 특색은 섬세한 감각과 시각적 이미지, 그리고 계절의 변화에 따른 시적 소재의 선택에 있다. 대표작 '봄은 고양이로다'는 다분히 보들레르적 발상법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고양이'라는 한 사물이 예리한 감각으로 조형되어 생생한 감각미를 보이고 있다.이 시는 작자의 순수지각(純粹知覺)에서 포착된 대상인 고양이를 통해서 봄이 주는 감각을 집약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1920년대 초반의 시단은 퇴폐주의, 낭만주의, 자연주의, 상징주의 등 서구문예사조에 온통 휩싸여 퇴폐성이나 감상성이 지나치게 노정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는 섬세한 감각과 이미지의 조형성을 보여줌으로써 바로 뒤를 이어 활동한 정지용(鄭芝溶)과 함께 한국시사에서 새로운 시적 경지를 개척하였다.
대구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경도중학(京都中學)을 졸업하였다. 문단의 교우관계는 양주동(梁柱東), 유엽(柳葉), 김영진(金永鎭), 오상순(吳相淳), 백기만(白基萬), 이상화(李相和) 등 극히 제한되어 있었고, 세속적인 것을 싫어하여 고독하게 살다가 1929년 11월 대구 자택에서 음독자살하였다.
작품활동은 1924년 '금성 金星' 5월호에 '실바람 지나간 뒤', '새 한마리', '불놀이', '무대(舞臺)', '봄은 고양이로다' 등 5편의 시작품과 톨스토이(Tolstoi)원작의 번역소설 '장구한 귀양'을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신민(新民)', '여명(黎明)', '신여성(新女性)', '여시(如是)', '생장(生長)', '조선문단(朝鮮文壇)'에 '동경(憧憬)', '석양구(夕陽丘)', '청천(靑天)의 유방(乳房)', '하일소경(夏日小景)', '봄철의 바다' 등 30여편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의 시는 사후 1951년 청구출판사(靑丘出版社)에서 간행된 백기만편의 '상화(尙火)와 고월(古月)'에 실린 11편만 전해지다가 1970년대 초반부터 그의 시연구가 본격화되면서 '봄과 고양이'(李章熙全集, 문장사, 1982)와 '봄은 고양이로다'(李章熙全集, 評傳, 문학세계사, 1983) 등 두권의 전집에 그의 유작이 총정리되었다.
이장희의 전 시편에 나타난 시적 특색은 섬세한 감각과 시각적 이미지, 그리고 계절의 변화에 따른 시적 소재의 선택에 있다. 대표작 '봄은 고양이로다'는 다분히 보들레르적 발상법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고양이'라는 한 사물이 예리한 감각으로 조형되어 생생한 감각미를 보이고 있다.이 시는 작자의 순수지각(純粹知覺)에서 포착된 대상인 고양이를 통해서 봄이 주는 감각을 집약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1920년대 초반의 시단은 퇴폐주의, 낭만주의, 자연주의, 상징주의 등 서구문예사조에 온통 휩싸여 퇴폐성이나 감상성이 지나치게 노정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는 섬세한 감각과 이미지의 조형성을 보여줌으로써 바로 뒤를 이어 활동한 정지용(鄭芝溶)과 함께 한국시사에서 새로운 시적 경지를 개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