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고승. 수안이씨(遂安李氏). 속명은 찬형(燦亨). 법호는 효봉(曉峰). 평안남도 양덕 출신. 1. 가계와 법조계 투신 아버지는 병억(炳億)이며, 어머니는 김씨(金氏)이다.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밑에서 사서삼경을 배웠으며, 1901년 평안감사가 베푼 백일장에서 장원급제하였다. 그뒤 평양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13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법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그뒤 10년 동안 법조계에 투신하여 서울과 함흥의 지방법원, 평양의 복심법원에서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최초의 판사가 되어 활동하였다. 2. 수행과 득도 1923년에 직책상 한 피고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게 되었지만, 인간이 인간을 벌하고 죽인다는 데 회의를 느껴 법관직을 팽개치고 전국방랑의 길에 올랐다. 엿판 하나를 들고 3년 동안 참회와 고행의 길을 걷다가 1925년 여름 금강산에 이르러 출가 수도인이 될 것을 결심하였다. 신계사(神溪寺) 보운암(普雲庵)의 석두화상(石頭和尙)을 찾아 간단한 선문답(禪問答)을 나눈 뒤 머리를 깎고 5계(戒)를 받았다. 38세의 출가는 매우 늦은 나이였으므로 이때부터 깨달음을 위한 용맹정진에 들어 갔다. 그해 여름과 겨울을 보운암에서 보내고 이듬해 여러 곳의 고승을 찾아 전국을 순례하였다. 남쪽으로는 통도사, 북쪽으로는 간도의 수월화상(水月和尙)을 찾아갔으나 별다른 소득이 없었고, 불교수행은 스스로 해결할 수 밖에 없음을 느껴 1927년 다시 금강산으로 돌아와 정진하였다. 밤에도 눕지 않고 앉은 채 좌선하였으며, 한번 앉으면 절구통처럼 움직일 줄 모른다고 하여 이때부터 '절구통 수좌(首座)'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러나 출가한 지 5년이 지났지만 깨달음을 얻지 못하자, 1930년 늦은 봄 금강산 법기암(法起庵) 뒤에 단칸 방을 짓고, 깨닫기 전에는 죽어도 밖에는 나오지 않을 것을 결심하고 토굴 안으로 들어 갔다. 하루 한끼만 먹으며 토굴 속에서 용맹정진 하다가, 1931년 여름 도를 깨닫고 벽을 발로 차서 무너뜨리고 토굴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석두화상에게 오도송(悟道頌)을 지어올리자 석두화상은 오도를 인가하였다. 1932년 사월초파일에 유점사에서 동선(東宣)을 계사(戒師)로 구족계(具足戒)와 보살계(菩薩戒)를 받았다. 그뒤 1933년 여름 여여원(如如院)에서 수행하며 오후에는 불식(不食)하였고, 겨울에는 마하연(摩訶衍) 선원에서 안거하였다. 이어서 부처님의 사리가 모셔진 전국의 적멸보궁(寂滅寶宮)을 찾아 한 철씩 정진하였고, 1936년에는 당대의 고승 한암(漢巖)과 만공(滿空) 으로부터 도를 인가받았다. 3. 승려 활동과 열반 1937년 조계산 송광사 삼일암(三日庵)에 안착하여 10년 동안 후학들을 지도하여 정혜쌍수(定慧雙修)에 대한 확고한 구도관을 열어주었으며, 이때 대종사(大宗師)의 법계(法階)를 받았다. 1946년 가을 가야산 해인사의 승려들이 해인사에 종합수도원인 가야총림(伽倻叢林)을 만들고 초대 방장(方丈)으로 추대하자, 6, 25사변으로 총림이 흩어질 때까지 5년 동안 많은 인재를 길러 내었다. 1950년 겨울 가야산에서 부산 동래의 금정선원(金井禪院)으로 옮겼고, 1951년 여름부터 1954년 3월까지 통영 용화사 도솔암(兜率庵)에 머물렀다. 1954년 여름, 통영 미륵산 너머에 미래사(彌來寺)를 창건하여 머무르던 중, 8월 17일에 불교계의 정화불사운동(淨化佛事運動)이 일어났으므로 서울 선학원(禪學院)에 머무르며 이를 지도하다가, 1955년 겨울 다시 미래사로 내려왔다. 1956년 여름에는 지리산 쌍계사의 탑전(塔殿)에서 정진하였으며, 11월에는 세계불교도우의회 제4차 대회에 참가하기 위하여 동산(東山), 청담(靑潭) 등과 함께 네팔에 갔다. 귀국한 직후 조계종의 의결기구인 종회(宗會)의 의장에 취임하였고, 1957년 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종무원장이 되어 정화불사에 골몰하였으며, 석우(石友) 종정(宗正)이 입적하자 새 종정에 추대되었다. 종정이 된 뒤, 1959년 겨울까지 주로 팔공산 동화사(桐華寺)에 머물렀으며, 1962년 4월 11일 통합종단 초대종정에 추대되었다. 그뒤 통영 미래사에 머물렀으나 건강이 나빠지자 치료차 다시 동화사로 옮겨 수행승들을 지도하였다. 1966년 5월, 거처를 밀양 표충사(表忠寺) 서래각(西來閣)으로 옮겨 머무르다가 10월 15일 오전에 단정히 앉아 입적하였다. 마지막까지 '무(無)라, 무라. ' 하였는데, 이는 평생의 수행도구로 삼았던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화두를 한시도 놓지 않았음을 뜻한다. 영결식은 10월 21일 서울 조계사에서 조계종 단장으로 치러졌으며, 다비(茶毘)를 하자 사리 50여과와 정골이 많이 나와 송광사, 표충사, 용화사, 미래사 등지에 나누어 봉안하였다. 평소 계율을 철저하게 지키고 제자들을 엄하게 가르쳤는데, 문하에서는 조계종의 수행승들을 지도하는 훌륭한 고승들이 많이 배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