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圓佛敎)제2대 종법사(宗法師). 본명은 도군(道君), 법명은 규(奎). 호는 정산(鼎山). 1900년 8월 4일 경상북도 성주에서 아버지 벽조(碧照), 어머니 이운외(李雲外)의 장자로 태어났다. 9세에 할아버지의 사숙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좋은 스승 만나기를 염원하던 중 원불교 교조인 박중빈(朴重彬)을 만나게 되어 원불교에 입문하였다. 원불교의 첫 사업인 영광(靈光)의 방언공사에 착수하면서부터 박중빈의 인정을 받고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방언공사가 끝나자 박중빈은 송규를 비롯한 8인 제자들과 함께 교단 창립의 정신적인 결속과 진리의 감응을 얻기 위하여 기도를 행하였는데, 송규는 중심적 위치에서이 과업을 수행하였다. 그뒤 부안의 내변산에서 박중빈과 함께 3년 동안 원불교정전을 초안하는 데 전력하였으며, 1924년 '불법연구회'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교단의 총부가 전라북도 이리에 건설되자 연구부장, 교무부장, 총무부장, 교정원장 등의 직책을 역임하였다. 1942년 박중빈의 '불교정전 佛敎正典' 편찬을 보좌하다가 1943년 6월 박중빈이 사망하자 종통을 계승하여 종법사에 취임하였다. 이어 교단의 해산과 일본 불교화의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일제의 압력에 대처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여 새로운 국가건설의 방향을 제시하는 '건국론 建國論'을 발표하는 한편, 국가의 긴급한 사업으로서 3대사업을 추진하였다. 첫째, 전재동포구호사업으로서 일본, 만주, 중국 등에서 귀국하는 전재동포를 구호하기 위해 서울, 이리, 부산 등지에 임시구호소를 설립하는 한편 전재고아를 수용, 양육하도록 하였다. 둘째, 한글보급운동으로서 그는 전국의 원불교 교역자를 소집하여 먼저 한글교육을 실시하고 그들이 각 지방으로 되돌아가서 한글보급과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도록 하였다. 셋째, 교육사업으로서 오늘의 원광대학교 전신인 유일학림(唯一學林)을 설립하고 중등부와 전문부를 두어 인재를 양성하였다. 그리하여 사회정화와 봉공정신을 교육이념으로 심으려고 노력하였다. 한편, 그는 교단의 재정비를 서둘러서, 1947년 '불법연구회'라는 임시 명칭을 '원불교'로 정식 개명, 선포하였고, 1948년에 원불교 교헌(敎憲)을 제정, 통과시켜 원불교 교단조직의 기초를 수립하였다. 이어 장차 원불교가 나아갈 방향목표를 교화, 교육, 자선이라는 3대사업으로 정하고 올바른 신념으로 뭉친 순수 민족자본의 운영으로 정비, 확충을 꾀하였다. 1953년부터는 교조의 언행록인 '대종경 大宗經'의 편수를 시작하여 1962년에 이를 발간하였다. 1961년 1월 22일에 그는 박중빈이 내놓은 일원대도(一圓大道)의 자각 위에서 전인류가 실행해야 될 세가지 대동화합의 길인 '삼동윤리(三同倫理)'를 최후의 법문으로 남기고 열반하였다. 그의 사상체계는 크게 세가지로 구별할 수 있다. 첫째, 교조인 박중빈이 제시한 '일원상의 진리'를 중심으로 하여 원불교의 일원종지를 확신하게 함으로써 이에 대한 신념체계를 세운 점이다. 그는 1932년에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 '원각가 圓覺歌'라는 가사를 지었는데, 우주와 인생의 근본진리에 대해 변(變), 불변(不變)이라는 인식원리를 통하여 진리를 깨닫게 되고이 진리를 실생활에까지 활용할 것을 밝혔다. 둘째, 일원상의 진리에 바탕한 사회개혁 및 국가건설에 대한 경륜을 실천하게 하였다. 광복 직후에 발표된 '건국론'을 살펴보면 치국의 방법을 세가지로 제시한다. 먼저 도치(道治)로써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우주의 진리를 깨치게 하며, 다음은 덕치(德治)로 지도자가 솔선수범해서 바른 일을 행하여 대중을 덕화하는 길이며, 마지막으로 정치로써 법의 위엄과 정의로 다스리며 함께 실행해야 된다는 것이다. 셋째, 일원상의 진리에 바탕한 범인류의 생활규범과 문명의 진전에 대응한 이상세계의 전망이다. 이것은 삼동윤리의 법문에 잘 나타나 있다. 그 내용을 보면 모든 종교와 교파가 근본은 다 같은 한 근원의 도리인 것을 알아서(同源道理), 모든 인종과 생령이 그 근본은 다 같은 한 기운으로 연계된 동포임을 알아서(同氣連契), 모든 사업과 주장이 다같이 세상을 개척하는 데에 힘이 되는 것을 알아서(同拓事業)대동화합하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