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월면(月面) 송도암(宋道巖)
  • 여산송씨(礪山宋氏),  출생~사망 : 1871 ~ 1946
근대의 고승. 여산송씨(礪山宋氏). 속명은 도암(道巖), 법호는 만공(滿空), 월면은 법명. 전라북도 정읍 출신. 신통(神通)의 아들이다. 1. 출가와 수업 1883년(고종 20) 김제 금산사에서 불상을 처음 보고 크게 감동한 것이 계기가 되어 출가를 결심하고, 공주 동학사(東鶴寺)로 출가하여 진암(眞巖) 문하에서 행자생활을 하였다. 1884년 경허(鏡虛)의 인도로 서산 천장사(天藏寺)에 가서 태허(泰虛)를 은사(恩師)로, 경허를 계사(戒師)로 삼아 사미십계(沙彌十戒)를 받고 득도하였다. 그뒤 '모든 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萬法歸一 一歸何處). '라는 화두(話頭)를 가지고 참선에 열중하였다. 1895년 아산 봉곡사(鳳谷寺)에서 새벽에 범종을 치면서 '법계의 본성을 관찰하여야 한다.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라는 게송(偈頌)을 읊다가 홀연 깨달았다. 그뒤 공주 마곡사(麻谷寺) 토굴에서 보경(普鏡)과 함께 계속 수도하다가 경허 로부터 '아직 진면목(眞面目)에 깊이 들어가지 못하였으니 조주(趙州)의 무자(無字) 화두를 가지고 다시 참선을 하도록 하라.'는 가르침을 받고 정진하였다. 그뒤 경허를 모시고 서산 부석사(浮石寺)와 부산 범어사의 계명암(鷄鳴庵) 등지에서 수도하였다. 1901년 경허와 헤어져 양산 통도사의 백운암(白雲庵)에 들러 며칠 머무르는 동안, 새벽에 '원컨대이 종소리가 법계에 두루 퍼져 철벽의 어둔이 모두 밝게 하소서(願此鐘聲遍法界 鐵圓幽音悉皆明). '라는 게송을 읊으면서 범종을 치는 소리를 듣고 크게 깨달았다. 그리하여 곧 천장사로 돌아와 법열을 즐기던 중, 1904년 함경북도 갑산으로 가던 길에 천장사에 들른 경허로부터 전법게(傳法偈)를 받았다. 1905년 예산 덕숭산(德崇山)에 금선대(金仙臺)를 짓고, 보임(保任)을 하는 동안 참선을 하려는 수도승들이 찾아와 그 지도를 맡게 되었다. 그뒤 3년 동안 금강산 마하연(摩訶衍)에서의 선(禪) 지도와 1937년을 전후하여 잠시 마곡사의 주지를 맡았던 때를 제외한 대부분의 생애를 덕숭산에 머물렀다. 이곳에서 선을 지도하면서 선불교를 크게 중흥시켜 현대 한국불교계에 하나의 큰 법맥을 형성하였다. 말년에는 덕숭산 상봉 가까이에 전월사(轉月舍)라는 초암을 짓고 생활을 하다가 1946년 10월 20일에 입적하였다. 나이 75세, 법랍(法臘) 62세였다. 덕숭산에서 다비하여 유골을 모신 부도(浮屠) 만공탑을 덕숭산 금선대 근처에 세웠다. 진영(眞影)은 경허의 진영과 함께 금선대에 봉안되어 있다. 2. 활동 그는 덕숭산 수덕사와 정혜사(定慧寺), 견성암(見性庵), 서산 안면도의 간월암(看月庵) 등을 크게 중창하였고 1920년대초에는 선학원(禪學院) 설립운동을 하였으며, 선승들의 결사(結社)인 동시에 경제적 자립을 위한 계(契)모임의 성격을 지닌 선우공제회운동(禪友共濟會運動)에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마곡사 주지로 있던 1937년, 당시의 조선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와 각도 지사가 동석한 조선총독부 회의실에서의 31본산주지회의에 참석하여 한국불교를 일본불교화하려는 총독부의 종교정책방침에 정면으로 반대하였다. 그 반대의 요지는 종교가 정치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는 점과 한국불교가 조선총독부의 종교정책에 의하여 일본불교로 변질되어 계율이 문란해지고 한국불교의 전통과 종교적 순수성이 흔들리고 있다는 점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리고 '전 조선총독 미나미(南次郞)는 한국불교를 파괴시켰으므로 분명히 지옥에 떨어질 것이니이 미나미총독을 우리가 지옥에서 구제하지 않으면 누가 구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1941년, 서울 선학원에서 개최한 전국고승법회에 초대되어 설법하고 계율을 올바로 지키고 선을 진작시켜 한국불교의 바른 맥을 이어가자고 하였다. 3. 사상 그의 사상과 선의 지도방법은 문도들이 편찬한 '만공어록 滿空語錄'에서 살필 수 있다. 그는 존재의 본체를 마음〔心〕, 자성(自性), 불성(佛性), 여여불(如如佛), 허공(虛空), 주인공(主人公), 본래면목(本來面目), 자심(自心), 동그라미 등으로 표현하였는데, 이 중 마음이라는 표현을 가장 많이 쓰고 있다. 물질과 상대되는 마음이나 심리학적인 마음이 아니라 우주와 만물의 본체를 뜻하는 마음으로, 개아(個我)의 본체와 우주의 본체를 하나로 파악하였다. 불교의 진수는이 마음을 깨닫는 데 있고 인간의 가치있는 삶도이 깨달음을 성취함으로써 찾아진다고 보았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수행자는 현상적인 차별이나 분별의 관념에서 철저히 벗어나야 하는데, 수행을 통하여이 경지에 이르면 그 어떤 사물의 구속으로부터도 자유롭게 지혜와 자비를 활용할 수 있으며, 그가 바로 불(佛)이요 스승이라 하였다. 이를 위한 수행법으로는 참선을 으뜸으로 보았다. 이론과 사변을 철저히 배제하고 무심(無心)의 태도로 화두를 참구(參究)하는 간화선법(看話禪法)을 채택하였고, 제자들에게는 항상 조주(趙州)의 무자화두를 참구하도록 가르쳤다. 참선의 보조여건으로는 선지식(善知識: 스승)과 수도에 적절한 도량(道場), 함께 수도하는 좋은 도반(道伴)의 세가지를 중시하였다. 그 중에서도 스승을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보았다. 진정한 스승은 수행자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자이며, 수행자가 스승을 얼마나 신뢰하느냐에 따라 참선의 수도가 좌우된다고 가르쳤다. 수도승들에 대한 지도방법은 매우 다양하여 침묵 또는 방망이질〔棒〕, 할(喝),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격외(格外)의 대화와 동그라미 등 상대와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여러가지 방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하였다. 1927년 그가 지은 '현양매구 懸羊買拘'라는 글의 끝에 자신을 '임제32대사문만공(臨濟三十二代沙門滿空)'이라 하여 그의 지도방법이 임제종풍을 계승한 것임을 뒷받침하고 있다. 특출한 제자로는 비구 보월(寶月), 용음(龍吟), 고봉(古峰), 서경(西耕), 혜암(惠庵), 전강(田岡), 금오(金烏), 춘성(春城) 등과 비구니 법희(法喜), 만성(萬性), 일엽(一葉)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