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고승, 독립운동가. 수원백씨(水原白氏). 속명은 상규(相奎), 법호는 용성(龍城). 진종은 법명. 전라북도 남원 출신. 아버지는 남현(南賢)이며, 어머니는 손씨(孫氏)이다. 1. 유년시절 및 출가내력 어려서부터 글을 잘 지었으며, 7세에 한학(漢學)을 배우기 시작하여 9세에 '합죽선 合竹扇'이라는 시를 지었다. 14세 때 부처로부터 법을 인가받는 꿈을 꾸었는데, 얼마 뒤 우연히 남원의 교룡산성(蛟龍山城)에 있는 덕밀암(德密庵)을 찾았을 때 그 절에 봉안된 부처가 꿈속에서 본 부처와 똑같이 생겼음을 발견하였다. 그때부터 덕밀암에 머무르다가 부모의 권유로 집에 돌아왔으나, 16세 때 가야산 해인사의 극락암(極樂庵)으로 출가하여 화월(華月)을 은사로, 혜조(慧造)를 수계사(授戒師)로 삼아 승려가 되었다. 2. 수행과 후학지도 그뒤 수월(水月)을 찾아 의성 고운사(孤雲寺)에 가서 염불법을 배워 열심히 수행하다가, 양주 보광사(普光寺)의 도솔암(兜率庵)으로 옮겨 6일 동안 선정에 들어 용맹정진한 결과 깨달은 바가 있었다. 이때부터 금강산과 보광사 도솔암 등에서 무자(無字) 화두(話頭)를 참구하여 그 의심을 풀었다. 1884년 양산 통도사의 선곡율사(禪谷律師)로부터 비구계와 보살계(菩薩戒)를 받았고, 조계산 송광사의 삼일암(三日庵)에서 정진하던 중 '전등록 傳燈錄'을 보다가 대오(大悟)하였다. 그뒤 33인의 승려를 모아 지리산 상선암(上禪庵)에서 참선을 지도하는 한편, '기신론 起信論', '법화경', '화엄경', '염송 拈頌', '범망경 梵網經', '사분율 四分律' 등을 섭렵하였다. 그뒤에도 계속 정진하면서 혜월(慧月), 만공(滿空) 등과 도를 논하였고, 금강산 불지암(佛地庵), 보개산 성주암(聖住庵)에서 많은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1905년 보개산에 관음전(觀音殿)을 세우고 '선문요지 禪門要旨'를 저술하였으며, 그해 11월 북한산 망월사(望月寺)에서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1906년 법천암(法泉庵)에 선원을 건립하였고, 1907년 중국으로 가서 중국 불교계를 2년 동안 시찰하였다. 1910년 지리산 칠불암(七佛庵)선원의 조실(祖室)로 추대되어 많은 수행자들을 지도, 육성하였다. 어느날 꿈에 부처의 교시를 받아 불교교리를 정리하는 저술작업과 한문경전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사업에 착수하였다. 먼저 '귀원정종 歸源正宗'을 저술하고 대중포교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1911년 서울에 와서 포교를 시작하는 한편, 이듬해 대사동에 선종교당(禪宗敎堂)을 세워 현대적 포교에 앞장을 섰다. 그리고 포교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광업에 관여하였다. 그뒤 서울 봉익동에 대각사(大覺寺)를 건립하여 대중을 계몽하였다. 1919년 3, 1운동 당시에는 한용운(韓龍雲)과 함께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의 대표자로 참가하여 구국운동에 헌신하였다. 모든 불교인에게 구국운동에 참가하도록 독려하였으며, 스스로 실천에 옮겼다. 그 결과 일본경찰에 붙잡혀 재판을 받았다. 그는 법정에서 '앞으로도 이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또 독립운동을 할 생각이다. '라고 하였다. 3년 동안 옥고를 치른 뒤 1921년 3월에 출옥하였으나 늘 일본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그뒤 서울 가회동에서 삼장역회(三藏譯會)를 만들어 저술사업에 몰두하였다. 그 결과 '심조만유론 心造萬有論', '각해일륜 覺海日輪', '석가사 釋迦史', '팔상록 八相錄' 등을 저술하였다. 또, 양산 내원사(內院寺) 만일선원(萬日禪院)의 조실로 있으면서 1926년 4월부터 1927년 10월까지 '화엄경' 80권을 한글로 번역하였는데, 이는 불경국역사업의 획기적인 업적으로 꼽히고 있다. 3. 대각교의 창립과 포교활동 그리고 1925년에는 서울 대각사에 대각교(大覺敎)를 창립하여 새로운 불교운동과 국민계몽운동을 시작하였다. 이는 국민 각자가 무한한 가능성과 지혜로움을 소유한 존재이고 진리적인 존재임을 자각하는 운동으로서,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 대승보살도(大乘菩薩道)를 실천하자는 데 뜻을 두고 있다. 그뒤 만주 용정(龍井)에 가서 백운산(白雲山)을 개간하여 화과원(華果院)을 경영하는 한편, 그곳에 대각교당(大覺敎堂)을 건립하고 선사상을 포교하는 등 선농일치운동(禪農一致運動)을 전개하였다. 특히, 사원경제의 자립을 위하여는 농사를 짓고 경작을 하면서 수행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스스로도 호미 등의 연장을 들고 노동하였다. 또한, 불교포교의 일환으로 박한영(朴漢永)과 함께 불교잡지인 '불일 佛日'을 간행하였고, 일요일마다 법회를 여는 일요학교를 개설하였다. 그리고 불교의식과 염불을 완전히 우리말로 번역하여 집전하였고, '찬불가 讚佛歌'를 지어 부르도록 하였다. 그밖에도 선의 보급을 위하여 도봉산 망월사에 '활구참선만일결사회(活句參禪萬日結社會)'를 조직하였고, 승려의 파계를 크게 개탄하였다. 총독부에서 주지가 되려면 비구계를 갖추어야 한다는 전통적인 조항을 삭제하려는 움직임이 있자 건백서(建白書)를 총독부에 제출하여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는 참선, 염불, 주력(呪力), 관법(觀法), 기도 등을 모두 섭렵한 폭넓은 고승으로서, 생전에 치아에서 금색 사리(舍利) 1과가 나온 이적을 보이고 있다. 나이 76세, 법랍 61세로 입적하였으며, 사리탑은 해인사 용탑선원(龍塔禪院) 옆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