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김동인(金東仁)
  • 전주김씨(全州金氏),  출생~사망 : 1900 ~ 1951
소설가. 호는 금동(琴童) 또는 춘사(春士). 평양 출신.

1. 유년기
아버지는 평양교회 초대장로였던 대윤(大潤)이며, 어머니는 옥씨(玉氏)이다. 3남1녀 중 차남이다. 소년기는 유복하면서도 아버지의 엄한 훈도 아래 친구 없는 유아독존적 생활을 하면서 성장했다. 1912년 평양 숭덕소학교를 졸업하고, 이어 기독교학교인 숭실중학교에 들어갔으나 이듬해 중퇴하였다. 1914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학원 중학부에 입학했으나, 동경학원 폐쇄로 메이지학원(明治學院)에 편입하였다. 이때 주요한(朱耀翰) 과의 경쟁의식 속에서, 의사나 변호사가 되려던 당초 목표와는 달리 많은 독서를 통해 문학에 뜻을 두기 시작했다. 명치학원을 졸업한 뒤 그림에 뜻을 두어 가와바타화학교(川端畵學校)에 들어갔으나 중퇴했다. 이 사이 부친상으로 일시 귀국하여 1918년 김혜인(金惠仁)과 혼인하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2. 문학활동과 시련
그리고 1919년 우리나라 최초의 문예동인지인 '창조 創造'를 자비로 출판하여, 창간호에 처녀작 '약한자의 슬픔'을, 제3∼6호에 '마음이 옅은 자여'를 발표하였다. 3, 1운동의 파문으로 귀국한 뒤, 아우의 부탁을 받아 격문을 초(草)하여주었다가, 출판법 위반으로 투옥되어 6개월 징역을 살았다. 1921년 경영난 때문에 '창조'를 제9호로 폐간하게 되면서 주색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다시 1924년에는 창작집 '목숨'을 자비로 출판하고, '창조'의 후신격인 동인지 '영대 靈臺'를 간행하였으나, 다음해 제5호로 폐간하였다. 그뒤 다시 방탕으로 가산을 탕진한 그는 1926년 평양에서 관개사업에 착수했다가 실패하고 이로 인해 부인도 가출하였다. 1928년에는 아우 동평을 도와 영화제작에 손을 대었으나 역시 실패하여 그의 생활은 극도로 궁핍해졌다. 다시 상경하여 40여일간 조선일보사 학예부에 봉직했고, 1930년 김경애(金瓊愛)와 재혼함으로써 방탕생활을 정리했다. 그뒤 생활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신문, 잡지에 수많은 소설과 사담(史譚)들을 썼다. 윤백남(尹白南)이 주재하던 월간 '야담 野談'에 기고한 것이 계기가 되어 사담에 손대기 시작하였다가 1935년 12월에는 '야담' 지를 직접 발간했고, 여기에 '광화사 狂畵師'를 발표했다. 1942년에는 이른바 일본 천황에 대한 불경죄라는 죄명으로 6개월간 복역하였으며, 광복 이후에는 빈곤과 불면증, 약물중독으로 시달리다가, 1951년 1, 4후퇴 때 가족들이 피난간 사이에 죽었다.

3. 작품세계
1919년 '창조'에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하면서 문학생활을 시작하였으며, '배따라기'(1921)로 확고한 문명(文名)을 얻었고, '감자'(1925), '명문 明文'(1925) 등 수많은 단편을 발표하여 우리나라의 근대단편소설의 양식을 확립하였다. 그의 작품세계는 크게 단편과 장편, 평론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단편소설은 자연주의적 사실주의 계열에 속하는 '감자', '배따라기', '김연실전 金姸實傳'(1939), '명문', '태형 笞刑'(1922), '발가락이 닮았다'(1932) 등과, 탐미주의적 계열에 속하는 '광염(狂炎) 소나타'(1929), '광화사', 그리고 민족주의적 색채를 보이고 있는 '붉은 산'(1932) 등 다양한 작품경향으로 구분된다. 이들은 모두 특유의 직선적이고 간결한 서술문체와 양식적 완결성이 잘 드러나 있는 순문학 지향의 작품들이다. 그러나 역사소설이나 사담 등을 포함한 후기의 장편소설들은 순문학적이기보다 상업적, 통속적인 경향이 짙은 것들이다. 그 중 대표적인 역사소설로는 '젊은 그들'(1929), '대수양 大首陽'(1932), '운현궁(雲峴宮)의 봄'(1933) 등이 있다. 이들은 당시 유행하던 역사소설의 일반적인 지향점과는 달리, 역사로부터의 교훈보다 인물의 개성을 살리는 묘사와 허구 등에 중점을 둔으로써 독특한 양식을 이루었고, 김동인 특유의 소설적 의식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처럼 다양하게 펼쳐진 모든 작품에서 이광수(李光洙)의 계몽적 교훈주의를 배척하고자 하였으며, 문학은 문학 자체의 아름다움에 귀속시키려는 경향을 지속적으로 보여주었다. 평론 '제월(霽月)씨의 평자적 가치(評者的價値)'를 비롯하여 '조선근대소설고 朝鮮近代小說考'(1929), '춘원연구 春園硏究'(1934, 1935) 등에서 이룩한 업적도 주로 이러한 문학의 예술적 독자성에 대한 인식과 기법이라는 형식주의적 차원에 집중되어 있다. 실제 작품에서도 서사적 과거시제, 액자소설적인 시점의 이동에 의한 객관적 기법, 사실주의적 문체의 확립 등 소설미학의 기법면에서 이룩한 그의 공적은 매우 크다. 물론, 지나친 이광수 비판에의 집착, 유아독존적인 성격과 예술지상주의적 문학관이 빚어낸 극단적 미의식, 작가우위적 창작태도, 뼈대만 그리는 직선적 구성 등에 있어 비판의 여지와 그 한계점도 많이 있으나, 무엇보다도 문학에 있어 교훈주의의 청산과 한국근대단편소설의 한 전형을 이룩했다는 점에서 김동인의 문학사적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그밖의 작품으로 '목숨'(1921), '정희', '시골 황서방'(1925), '송동이'(1929), '어머니'(일명 곰네, 1941), '반역자 反逆者'(1946), '망국인기 亡國人記'(1947) 등의 단편과, 장편으로 '여인 女人'(1930), '왕부(王府)의 낙조(落照)'(1935) 등이 있다. 그리고 죽은 뒤 '동인전집' 전 10권(1964)과 '김동인전집' 전 7권(1976)이 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