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대 대통령 (재임 1963~1979). 군인. 호는 중수(中樹). 고령박씨 직강공파 29세손이다.
1. 출생과 일본군 장교 생활
1917년 11월 14일에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에서 빈농인 아버지 박성빈(朴成彬)과 어머니 백남의(白南儀) 사이에서 5남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박성빈은 조선 말에 효력부위를 지냈으나 동학 접주 출신으로 연좌되어 가장으로서 경제생활을 할 수 없었고, 맏형 박동희는 독립하였으며 둘째 형 박무희와 셋째 형 박상희가 실질적인 가장으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아버지 박성빈과 둘째 형 박무희는 인근 경기도 관찰사를 지낸 칠곡군의 갑부 장승원(張承遠)을 찾아가 그의 집안 토지의 소작농으로 생계를 유지했는데, 후일 장승원의 아들 장택상(張澤相, 제3대 국무총리)은 이를 회자화 하며 박정희를 공격했고 박정희는 이로 인해 장택상과 아주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유년기에는 서당에 다니며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1926년 4월 1일에 구미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박정희는 학교 수업 외에 독서를 즐겼는데, 군인을 동경하였으며 그중 나폴레옹과 이순신의 위인전을 탐독해 읽었다고 한다.
1932년 3월 1일에 구미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사범학교에 응시했다. 당시 학비를 댈 엄두도 못 냈던 그의 가족들은 내심 그의 사범학교 진학을 포기했으면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구미공립보통학교의 담임과 교장이 방문하여 박정희의 부모를 설득하여 대구사범학교에 응시하게 하였다. 누나 박재희의 증언에 의하면 어머니 백남의는 박정희가 시험에서 떨어지기를 빌었다고 한다. 합격하고 진학을 못 하면 한이 생긴다고 하여 불합격을 빌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51등으로 합격하였다.
1932년 4월 1일 대구사범학교에 제4기생으로 진학하였다. 이때 입학정원 100명이었는데 이 중 조선인 90명, 일본인 10명이었다. 대구사범학교 진학 후 박정희는 집을 떠나 대구 시내의 기숙사에서 등하교하였다. 대구사범학교 5년 중 3년간 그의 성적은 하위권이었으나, 군사 및 체육 관련 교과목의 성적은 뛰어났다.
1936년 4월 1일 대구사범을 졸업하기 1년 전에 세 살 아래인 김호남과 결혼했다. 병을 앓고 있던 아버지 박성빈이 죽기 전에 막내가 결혼하는 걸 보고 싶다고 간청하여 이루어진 결혼이었다. 혼인 당시 박정희는 한국 나이로 스무 살이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조혼도 아니었다.
1937년 3월 25일 대구사범을 졸업하고, 1937년 4월 1일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4학년을 맡았다. 그해 박정희의 장녀 박재옥이 태어났다. 박정희가 교사로 재직 중이던 1938년 9월 4일에 아버지 박성빈이 67세로 사망하였다. 박정희는 문경공립보통학교에서 1940년 2월까지 3년간 교직생활을 했다.
1940년 만주의 신경군관학교(新京軍官學校) 제2기생으로 입학했다. 이 군관학교를 최우등생으로 수료한 뒤 일본육군사관학교로 제57기로 편입, 1944년 4월 박정희는 300명 가운데 3등의 성적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 57기를 졸업했다. 1944년 7월 열하성(熱河省) 흥륭현 주둔 만주국군 보병 제8단에 배속되고 12월 23일 정식 만주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박정희가 배속되었던 보병 제8단의 주 토벌 부대는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공산주의계열 독립군들이 팔로군에 가담하였고 박정희가 팔로군 토벌에 참여하였으므로, 독립군 토벌에도 참여한 셈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1939년 만주군 간도특설대의 대대적인 공세에 의해 당시 만주에 있던 수많은 항일계열 군사조직이 1942년 소멸되었고, 1940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충칭(重慶)에서 광복군을 편성하자 독립군 대부분이 광복군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근거지를 중국 내륙에 위치한 충칭으로 옮겨갔다. 충칭은 열하성과는 2,000Km 이상 떨어진 곳이어서 1944년에 배속된 박정희는 그 어떤 독립군도 토벌할 기회조차 없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소속 부대가 없어진 박정희는 9월 21일 동료들과 함께 베이징 쪽으로 건너가, 장교 경험자를 찾고 있던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어, 북경의 김학규가 지휘하는 한국광복군 제3지대 제1대대 제2중대장에 임명되어 광복군 장교로 활동하다가 1946년 5월 8일 미군 수송선을 타고 부산항으로 귀국하였다.
2. 광복 후 군인생활
1946년 9월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 제2기로 졸업하고 육군대위로 임관하였다. 그 뒤 육군 소령으로 진급, 1948년 육군본부 작전정보국에 근무하던 중 여수·순천 사건 연루 혐의를 받았다. 여수·순천 사건 후에 시작된 대한민국 정부의 군대 내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숙군작업에서 박정희는 남조선로동당(남로당) 군부 하부조직책으로 의심받아 그해 11월 11일 체포되었다. 1심에서 파면, 급료몰수,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 징역 10년으로 감형되고, 육군본부의 동료, 상사들의 구명운동에 의하여 집행정지 조치를 받았다. 다음 해 1월 강제 예편되었으며 정보국 문관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1950년 6월 한국 전쟁 중 소령으로 현역에 복귀하였고 이후 육군본부 작전정보국 제1과장을 거쳐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될 때 중령으로 진급하고 대구로 올라가는 육군본부의 수송지휘관을 맡았다. 10월 육영수를 소개받았고 육군본부의 전방지휘소가 서울특별시로 이동하게 되자, 그는 서둘러 약혼식을 올렸다. 10월 25일 장도영의 추천으로 제9사단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1950년 12월 12일 박정희는 대구시의 한 성당에서 육영수와 결혼식을 올렸다.
한국전쟁 동안 주로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근무하다 1953년 장군이 되었다. 1954년 제2군단 포병사령관, 1955년 제1군참모장, 1960년 육군군수기지사령관, 제1관구사령관,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을 지냈다.
3. 군정시대
1961년 5월 16일 제2군 부사령관으로 재직중, 군부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는 18년5개월간을 집권하였는데, 그의 통치시대는 3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4.19의거로 성립된 민주당정부를 무능, 부패 정부로 규정하고 쿠데타에 의해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와 그를 따르는 김종필(金鍾泌) 등 일단의 장교들은 쿠데타 성공 후 곧바로 계엄령을 선포, 삼권을 장악하였다. 이른바 혁명주체세력은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설치, 이를 통해 입법, 행정권과 사법권의 일부를 행사하였다. 그 의장은 박정희 였다.
이로부터 2년7개월간 군정이 실시되는데, 최고통치권자인 최고회의의장 박정희는 먼저 구질서의 전면적인 개혁이라는 목표 아래 모든 정당, 사회단체의 해체를 포고하는 한편, 용공분자와 폭력배의 검거에 착수하였다. 정권을 장악한 그해말까지 3,000여명의 용공분자와 4,000여명의 폭력배를 체포하였다. 군사정부는 '농어촌고리채정리령'을 발표하였으며 부정축재자에 대한 가차없는 조사를 실시하였다. 사회기풍을 바로잡기 위하여 댄스홀, 고급요정 등 모든 환락가의 문을 폐쇄하게 하였으며, 비밀댄스홀에서 춤을 즐기던 남녀를 군사재판에 회부하여 최고 1년6월의 징역을 선고하였다.
쿠데타 1개월이 못 되어 전국적으로 보안관계 범법혐의자의 검거수만도 3만5천여건에 달하였다는 사실은 군정 초기에 얼마나 철저한 구악일소작업과 강력정치가 진행되었던가를 짐작하게 한다. 또한 군사정부는 국민운동본부를 설치, 생활간소화, 가족계획, 문맹퇴치사업을 벌이는 한편, 친선방문외교, 초청외교 등 적극외교의 자세를 보였다. 획기적인 경제조치의 하나로 단행된 통화개혁은 실패로 끝났다. 군정 초기의 집권세력 내부에는 주류파와 비주류파 사이에 주도권쟁탈전이 벌어져 일련의 반혁명사건이 꼬리를 이었다.이 과정에서 비주류파는 완전히 거세되고 박정희 중심의 주류세력이 실권파로 정권장악의 기반을 확고히 하였다.
군정 후반은 민정이양을 둘러싼 공방으로 전국이 소란하였다. 박정희는 처음에는 2년 후에 정권을 민간에 이양하겠다는 민정이양일정을 발표하였으나 1963년 1월부터 시작된 정치활동재개 이후 야당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서는 이른바 '2.27선언'을 통하여 자신의 원대복귀를 약속하였다. 그러나 '4.8조치'로 군정연장을 계획하였다가 여론의 반대에 부딪혀 철회하는 등 번의를 거듭하였다. 이동안 군정은 이른바 '4대의혹사건'을 저질러 국민들로부터 '구악을 뺨치는 신악'이라는 비판을 듣기도 하였다.
4. 제3공화국 시대
박정희는 1963년의 대통령선거에서 야당의 단일후보인 윤보선(尹潽善)을 근소한 표차로 누르고 당선됨으로써 제3공화국의 통치권자가 되었다. 대통령취임사를 통해 박정희는 '정치적 자주와 경제적 자립, 사회적 융화, 안정을 목표로 대혁신운동을 추진함에 있어서 우리는 먼저 개개인의 정신적 혁명을 전개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제3공화국의 박정희 정부가 가장 역점을 두고 추진한 작업은 경제발전과 한, 일국교정상화였다. 박정희는 이미 군정기간인 1962년 제1차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수립, 추진하였다. 사회경제적인 악순환을 지양하고 자립경제확립을 위한 기반구축을 목표로 한 제1차5개년계획은 당시 후진국 가운데서는 가장 높은 국민총생산(GNP)성장률인 연평균 7.1%를 책정하였다. 그러나 계획 자체의 졸속과 무엇보다도 경제발전에 필요한 자본 부족으로 제1차5개년계획은 전반적으로 실적미달이었다.
한, 일국교정상화는 경제발전에 필요한 자본확보와 미국의 압력이라는 복합적인 이유로 추진되었다. 박정희는 집권하자마자 대일협상에 강한 의욕을 보였으며, 이미 군정기간인 1961년 10월에 일본 동경에서 제1차한, 일회의가 열렸다. 이와 함께 실무교섭이 활발히 진행되었고, 박정희는 국가원수로서는 최초로 일본수상과 회담하는 등 한, 일문제 타결에 열의를 보였다. 이같은 대일자세는 '친일외교', '흑막외교'라는 비난을 받았다.
박정희 정부의 대일저자세시비는 제3공화국 의회 벽두에 대통령국회출석결의안 등으로 논란될 만큼 국민의 대일감정을 자극하였다. 특히 한국어민의 생명선이라 할 수 있는 어업 및 평화선문제와 이른바 '김, 오히라메모(金, 大平memo)'로 결정된 6억달러의 대일청구권자금은 여론의 강력한 반대를 받았다. 한, 일문제를 둘러싼 여야와 정부, 국민간의 공방은 '6.3사태' 등 한때 정국의 위기까지 불러일으켰으나 박정희 정부는 반대의견을 물리치고 일을 성사시켜 결국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이 정식으로 조인되었다. 한, 일국교정상화에 따른 일본으로부터의 자금도입과 기타 차관 등을 통하여 제3공화국 후반부터는 급속도로 경제성장이 이루어졌다. 박정희는 고성장, 수출드라이브, 산업기지건설 등을 통하여 국정에 자신감을 가졌으며, 이와 함께 점차 독재성향을 띠어가기 시작하였다. 한일회담 타결, 월남파병 등으로 미국 으로부터도 신임을 얻은 박정희는 강한 권력욕을 드러냈는데, 그 결과는 1968년 3선개헌으로 나타났다.
5. 유신시대
1972년 10월 박정희는 헌법효력의 일부 정지, 국회해산, 정당활동금지의 담화를 발표하고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정부는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하여 대통령을 선출하는 '유신헌법'을 제정,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한 후, 이 헌법에 따라 제8대대통령에 박정희를 선출하였다. 이로써 제4공화국이 시작되었다. 유신체제는 사실상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가능하게 하는 체제였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의 권한을 막강한 것으로 보장해줌으로써 박정희에게 독재체제의 길을 열어주었다. 이 체제 아래서 민주주의는 크게 후퇴하였다. 유신헌법의 개정을 요구하는 주장이 야당과 재야세력에서 광범위하게 대두하였으나, 박정희는 이를 '대통령긴급조치'로써 탄압하였다. 유신체제 7년간 수많은 정치인, 종교인, 지식인, 학생들이 긴급조치에 걸려 투옥 당하였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여론도 한국의 강압정치를 비난하였으나 박정희는 굽히지 않았다.
독재적인 통치에 의해 박정희 정부는이 기간 기록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연간 10%를 넘나드는 고도성장이었고 국민소득도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빈부격차를 가속화시켰고, 황금만능사상으로 사회갈등과 함께 국민정신문화를 크게 황폐화시키는 결과를 빚었다. 한편, 경제발전을 배경으로 국가안보면에서 빈틈없는 태세를 구축한 것은 박정희의 공으로 기록될만하다. 박정희는 한반도 긴장완화를 위한 남북대화에 힘써 한동안 남북적십자회담, 남북조절위원회회담 등을 열었고, 남북간 밀사교환을 이루었으나 대화는 결국 실패로 끝났다.
1979년 유신체제에 항거하는 '부마사태(釜馬事態)'가 절정을 이루던 때, 10월 26일 궁정동 만찬석상에서 측근의 한 사람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金載圭)가 쏜 총탄을 맞고 죽었다. 그와 함께 유신체제도 끝났다.
1. 출생과 일본군 장교 생활
1917년 11월 14일에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에서 빈농인 아버지 박성빈(朴成彬)과 어머니 백남의(白南儀) 사이에서 5남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박성빈은 조선 말에 효력부위를 지냈으나 동학 접주 출신으로 연좌되어 가장으로서 경제생활을 할 수 없었고, 맏형 박동희는 독립하였으며 둘째 형 박무희와 셋째 형 박상희가 실질적인 가장으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아버지 박성빈과 둘째 형 박무희는 인근 경기도 관찰사를 지낸 칠곡군의 갑부 장승원(張承遠)을 찾아가 그의 집안 토지의 소작농으로 생계를 유지했는데, 후일 장승원의 아들 장택상(張澤相, 제3대 국무총리)은 이를 회자화 하며 박정희를 공격했고 박정희는 이로 인해 장택상과 아주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유년기에는 서당에 다니며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1926년 4월 1일에 구미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박정희는 학교 수업 외에 독서를 즐겼는데, 군인을 동경하였으며 그중 나폴레옹과 이순신의 위인전을 탐독해 읽었다고 한다.
1932년 3월 1일에 구미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사범학교에 응시했다. 당시 학비를 댈 엄두도 못 냈던 그의 가족들은 내심 그의 사범학교 진학을 포기했으면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구미공립보통학교의 담임과 교장이 방문하여 박정희의 부모를 설득하여 대구사범학교에 응시하게 하였다. 누나 박재희의 증언에 의하면 어머니 백남의는 박정희가 시험에서 떨어지기를 빌었다고 한다. 합격하고 진학을 못 하면 한이 생긴다고 하여 불합격을 빌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51등으로 합격하였다.
1932년 4월 1일 대구사범학교에 제4기생으로 진학하였다. 이때 입학정원 100명이었는데 이 중 조선인 90명, 일본인 10명이었다. 대구사범학교 진학 후 박정희는 집을 떠나 대구 시내의 기숙사에서 등하교하였다. 대구사범학교 5년 중 3년간 그의 성적은 하위권이었으나, 군사 및 체육 관련 교과목의 성적은 뛰어났다.
1936년 4월 1일 대구사범을 졸업하기 1년 전에 세 살 아래인 김호남과 결혼했다. 병을 앓고 있던 아버지 박성빈이 죽기 전에 막내가 결혼하는 걸 보고 싶다고 간청하여 이루어진 결혼이었다. 혼인 당시 박정희는 한국 나이로 스무 살이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조혼도 아니었다.
1937년 3월 25일 대구사범을 졸업하고, 1937년 4월 1일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4학년을 맡았다. 그해 박정희의 장녀 박재옥이 태어났다. 박정희가 교사로 재직 중이던 1938년 9월 4일에 아버지 박성빈이 67세로 사망하였다. 박정희는 문경공립보통학교에서 1940년 2월까지 3년간 교직생활을 했다.
1940년 만주의 신경군관학교(新京軍官學校) 제2기생으로 입학했다. 이 군관학교를 최우등생으로 수료한 뒤 일본육군사관학교로 제57기로 편입, 1944년 4월 박정희는 300명 가운데 3등의 성적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 57기를 졸업했다. 1944년 7월 열하성(熱河省) 흥륭현 주둔 만주국군 보병 제8단에 배속되고 12월 23일 정식 만주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박정희가 배속되었던 보병 제8단의 주 토벌 부대는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공산주의계열 독립군들이 팔로군에 가담하였고 박정희가 팔로군 토벌에 참여하였으므로, 독립군 토벌에도 참여한 셈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1939년 만주군 간도특설대의 대대적인 공세에 의해 당시 만주에 있던 수많은 항일계열 군사조직이 1942년 소멸되었고, 1940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충칭(重慶)에서 광복군을 편성하자 독립군 대부분이 광복군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근거지를 중국 내륙에 위치한 충칭으로 옮겨갔다. 충칭은 열하성과는 2,000Km 이상 떨어진 곳이어서 1944년에 배속된 박정희는 그 어떤 독립군도 토벌할 기회조차 없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소속 부대가 없어진 박정희는 9월 21일 동료들과 함께 베이징 쪽으로 건너가, 장교 경험자를 찾고 있던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어, 북경의 김학규가 지휘하는 한국광복군 제3지대 제1대대 제2중대장에 임명되어 광복군 장교로 활동하다가 1946년 5월 8일 미군 수송선을 타고 부산항으로 귀국하였다.
2. 광복 후 군인생활
1946년 9월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 제2기로 졸업하고 육군대위로 임관하였다. 그 뒤 육군 소령으로 진급, 1948년 육군본부 작전정보국에 근무하던 중 여수·순천 사건 연루 혐의를 받았다. 여수·순천 사건 후에 시작된 대한민국 정부의 군대 내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숙군작업에서 박정희는 남조선로동당(남로당) 군부 하부조직책으로 의심받아 그해 11월 11일 체포되었다. 1심에서 파면, 급료몰수,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 징역 10년으로 감형되고, 육군본부의 동료, 상사들의 구명운동에 의하여 집행정지 조치를 받았다. 다음 해 1월 강제 예편되었으며 정보국 문관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1950년 6월 한국 전쟁 중 소령으로 현역에 복귀하였고 이후 육군본부 작전정보국 제1과장을 거쳐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될 때 중령으로 진급하고 대구로 올라가는 육군본부의 수송지휘관을 맡았다. 10월 육영수를 소개받았고 육군본부의 전방지휘소가 서울특별시로 이동하게 되자, 그는 서둘러 약혼식을 올렸다. 10월 25일 장도영의 추천으로 제9사단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1950년 12월 12일 박정희는 대구시의 한 성당에서 육영수와 결혼식을 올렸다.
한국전쟁 동안 주로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근무하다 1953년 장군이 되었다. 1954년 제2군단 포병사령관, 1955년 제1군참모장, 1960년 육군군수기지사령관, 제1관구사령관,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을 지냈다.
3. 군정시대
1961년 5월 16일 제2군 부사령관으로 재직중, 군부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는 18년5개월간을 집권하였는데, 그의 통치시대는 3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4.19의거로 성립된 민주당정부를 무능, 부패 정부로 규정하고 쿠데타에 의해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와 그를 따르는 김종필(金鍾泌) 등 일단의 장교들은 쿠데타 성공 후 곧바로 계엄령을 선포, 삼권을 장악하였다. 이른바 혁명주체세력은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설치, 이를 통해 입법, 행정권과 사법권의 일부를 행사하였다. 그 의장은 박정희 였다.
이로부터 2년7개월간 군정이 실시되는데, 최고통치권자인 최고회의의장 박정희는 먼저 구질서의 전면적인 개혁이라는 목표 아래 모든 정당, 사회단체의 해체를 포고하는 한편, 용공분자와 폭력배의 검거에 착수하였다. 정권을 장악한 그해말까지 3,000여명의 용공분자와 4,000여명의 폭력배를 체포하였다. 군사정부는 '농어촌고리채정리령'을 발표하였으며 부정축재자에 대한 가차없는 조사를 실시하였다. 사회기풍을 바로잡기 위하여 댄스홀, 고급요정 등 모든 환락가의 문을 폐쇄하게 하였으며, 비밀댄스홀에서 춤을 즐기던 남녀를 군사재판에 회부하여 최고 1년6월의 징역을 선고하였다.
쿠데타 1개월이 못 되어 전국적으로 보안관계 범법혐의자의 검거수만도 3만5천여건에 달하였다는 사실은 군정 초기에 얼마나 철저한 구악일소작업과 강력정치가 진행되었던가를 짐작하게 한다. 또한 군사정부는 국민운동본부를 설치, 생활간소화, 가족계획, 문맹퇴치사업을 벌이는 한편, 친선방문외교, 초청외교 등 적극외교의 자세를 보였다. 획기적인 경제조치의 하나로 단행된 통화개혁은 실패로 끝났다. 군정 초기의 집권세력 내부에는 주류파와 비주류파 사이에 주도권쟁탈전이 벌어져 일련의 반혁명사건이 꼬리를 이었다.이 과정에서 비주류파는 완전히 거세되고 박정희 중심의 주류세력이 실권파로 정권장악의 기반을 확고히 하였다.
군정 후반은 민정이양을 둘러싼 공방으로 전국이 소란하였다. 박정희는 처음에는 2년 후에 정권을 민간에 이양하겠다는 민정이양일정을 발표하였으나 1963년 1월부터 시작된 정치활동재개 이후 야당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서는 이른바 '2.27선언'을 통하여 자신의 원대복귀를 약속하였다. 그러나 '4.8조치'로 군정연장을 계획하였다가 여론의 반대에 부딪혀 철회하는 등 번의를 거듭하였다. 이동안 군정은 이른바 '4대의혹사건'을 저질러 국민들로부터 '구악을 뺨치는 신악'이라는 비판을 듣기도 하였다.
4. 제3공화국 시대
박정희는 1963년의 대통령선거에서 야당의 단일후보인 윤보선(尹潽善)을 근소한 표차로 누르고 당선됨으로써 제3공화국의 통치권자가 되었다. 대통령취임사를 통해 박정희는 '정치적 자주와 경제적 자립, 사회적 융화, 안정을 목표로 대혁신운동을 추진함에 있어서 우리는 먼저 개개인의 정신적 혁명을 전개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제3공화국의 박정희 정부가 가장 역점을 두고 추진한 작업은 경제발전과 한, 일국교정상화였다. 박정희는 이미 군정기간인 1962년 제1차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수립, 추진하였다. 사회경제적인 악순환을 지양하고 자립경제확립을 위한 기반구축을 목표로 한 제1차5개년계획은 당시 후진국 가운데서는 가장 높은 국민총생산(GNP)성장률인 연평균 7.1%를 책정하였다. 그러나 계획 자체의 졸속과 무엇보다도 경제발전에 필요한 자본 부족으로 제1차5개년계획은 전반적으로 실적미달이었다.
한, 일국교정상화는 경제발전에 필요한 자본확보와 미국의 압력이라는 복합적인 이유로 추진되었다. 박정희는 집권하자마자 대일협상에 강한 의욕을 보였으며, 이미 군정기간인 1961년 10월에 일본 동경에서 제1차한, 일회의가 열렸다. 이와 함께 실무교섭이 활발히 진행되었고, 박정희는 국가원수로서는 최초로 일본수상과 회담하는 등 한, 일문제 타결에 열의를 보였다. 이같은 대일자세는 '친일외교', '흑막외교'라는 비난을 받았다.
박정희 정부의 대일저자세시비는 제3공화국 의회 벽두에 대통령국회출석결의안 등으로 논란될 만큼 국민의 대일감정을 자극하였다. 특히 한국어민의 생명선이라 할 수 있는 어업 및 평화선문제와 이른바 '김, 오히라메모(金, 大平memo)'로 결정된 6억달러의 대일청구권자금은 여론의 강력한 반대를 받았다. 한, 일문제를 둘러싼 여야와 정부, 국민간의 공방은 '6.3사태' 등 한때 정국의 위기까지 불러일으켰으나 박정희 정부는 반대의견을 물리치고 일을 성사시켜 결국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이 정식으로 조인되었다. 한, 일국교정상화에 따른 일본으로부터의 자금도입과 기타 차관 등을 통하여 제3공화국 후반부터는 급속도로 경제성장이 이루어졌다. 박정희는 고성장, 수출드라이브, 산업기지건설 등을 통하여 국정에 자신감을 가졌으며, 이와 함께 점차 독재성향을 띠어가기 시작하였다. 한일회담 타결, 월남파병 등으로 미국 으로부터도 신임을 얻은 박정희는 강한 권력욕을 드러냈는데, 그 결과는 1968년 3선개헌으로 나타났다.
5. 유신시대
1972년 10월 박정희는 헌법효력의 일부 정지, 국회해산, 정당활동금지의 담화를 발표하고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정부는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하여 대통령을 선출하는 '유신헌법'을 제정,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한 후, 이 헌법에 따라 제8대대통령에 박정희를 선출하였다. 이로써 제4공화국이 시작되었다. 유신체제는 사실상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가능하게 하는 체제였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의 권한을 막강한 것으로 보장해줌으로써 박정희에게 독재체제의 길을 열어주었다. 이 체제 아래서 민주주의는 크게 후퇴하였다. 유신헌법의 개정을 요구하는 주장이 야당과 재야세력에서 광범위하게 대두하였으나, 박정희는 이를 '대통령긴급조치'로써 탄압하였다. 유신체제 7년간 수많은 정치인, 종교인, 지식인, 학생들이 긴급조치에 걸려 투옥 당하였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여론도 한국의 강압정치를 비난하였으나 박정희는 굽히지 않았다.
독재적인 통치에 의해 박정희 정부는이 기간 기록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연간 10%를 넘나드는 고도성장이었고 국민소득도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빈부격차를 가속화시켰고, 황금만능사상으로 사회갈등과 함께 국민정신문화를 크게 황폐화시키는 결과를 빚었다. 한편, 경제발전을 배경으로 국가안보면에서 빈틈없는 태세를 구축한 것은 박정희의 공으로 기록될만하다. 박정희는 한반도 긴장완화를 위한 남북대화에 힘써 한동안 남북적십자회담, 남북조절위원회회담 등을 열었고, 남북간 밀사교환을 이루었으나 대화는 결국 실패로 끝났다.
1979년 유신체제에 항거하는 '부마사태(釜馬事態)'가 절정을 이루던 때, 10월 26일 궁정동 만찬석상에서 측근의 한 사람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金載圭)가 쏜 총탄을 맞고 죽었다. 그와 함께 유신체제도 끝났다.
슬하에 박근혜(朴槿惠), 박근령(朴槿令), 박지만((朴志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