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 8월 26일 충청남도 아산군 둔포면 신항1리 새말부락에서 중추원의관 윤치소(尹致昭)와 중추원의관을 지낸 전주이씨 이재룡(李載龍, 다른 이름은 이봉하(李鳳夏))의 장녀인 이범숙(李範淑)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부유한 환경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아버지 윤치소는 아산군의 만석꾼이었다. 외가 역시 부유하였는데 어머니 역시 아산의 만석꾼의 딸이었다. 그가 어려서 자란 안국동의 자택 안동장은 99칸의 대저택이었다.
10세 때 집 근처의 교동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1910년 4년 과정의 교동보통소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충무로의 일본인 거류민들이 설립한 일출(日出)소학교에 5학년으로 편입학한 뒤 1912년 일출소학교를 졸업하였다.
1913년 일본으로 유학, 도쿄(東京)로 건너가 스키치의 게이오 의숙(慶應義塾) 의학부에서 공부하다가 1915년 일시 귀국하여 민영환과 6촌인 민영철의 딸 여흥 민씨와 결혼하고 일본으로 되돌아갔다. 1915년말 게이오 의숙 2학년을 중퇴하고 부산항을 통해 되돌아왔다.
귀국해 일본에서 돌아온 여운형을 만난 걸 계기로 여운형을 따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임시정부로 찾아가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19년 3월 13일 그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의원에 특별 선출되었다. 당시 그는 21세로 임시의정원 의원들 중 최연소자였다.
1921년 상하이 생활 3년 만에 중국인 학생을 가장하고 중국을 떠나 영국으로 유학하였다. 젊은 시절 영국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대학에 유학하여 일찍이 해외문물을 접할 수 있었다. 유학 6년 만인 1932년 아내 여흥 민씨를 데리고 귀국한 뒤에는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관여하기보다는 국내의 상황에 관심을 가졌으며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신사 참배령에 불응하는 등 일본 총독통치에 관여 또는 협조하지 않았다.
1945년 광복이 되고 미군이 진주하게 되자 해외에서 공부한 보수적인 인사들과 함께 공산당에 맞서는 한국민주당의 창당에 관여하게 되었으며, 이어 미군정청이 영어를 사용할 수 있는 인사들을 행정요직에 등용하게 되자 미군정청 농상국 고문으로 일하게 되었다. 국내의 정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주로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의 인사들과 깊은 연관을 맺고 활동하였다. 이 시기에 그가 맡았던 중요한 직책은 한영협회 회장과 민중일보사 사장이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서울시장으로 발탁되었으며 곧이어 1949년 상공부장관이 되었다. 그리고 6.25중에는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의 일을 맡았으며 상이군인신생회 회장의 일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단체를 통하여 사변기간 동안 전재아동(戰災兒童)과 상이군인들을 위한 원호활동에 노력하였다. 이어 1953년에 실시된 제3대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1957년 당시 이승만(李承晩) 독재에서 야당의 위치에 있었던 민주당의 중앙위원회 의장에 선임되었다.
1958년 다시 제4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그 다음해 민주당 최고의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1960년 제4대 국회는 제3차 개헌을 통해 의원 내각제(양원제)를 채택하고 해산되었다. 5월 10일의 제5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8월 12일 민의원, 참의원 합동회의에서 출석의원 263명 중 259명의 출석으로 열린 1차 투표에서 208표를 얻은 윤보선은 29표를 얻은 김창숙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당시 민주당은 신익희(申翼熙), 조병옥(趙炳玉) 등 구파의 핵심인사들이 죽고 난 뒤였기 때문에 김도연(金度演)과 함께 사실상 구파의 중심인물로 부상하게 되었다.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부가 물러나고 새롭게 민주당이 집권하게 되었을 때 민주당의 신, 구파 사이에는 집권을 위한 갈등이 심하게 표출되었는데, 이때 구파의 대표적인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신, 구파의 협상에 의하여 대통령으로 선출될 수 있었다. 그리고 같은 자파의 김도연을 국무총리로 선임하였으나 국회인준 획득에 실패하자 신파의 장면(張勉)을 다시 국무총리로 지명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으로 신, 구파는 사실상 분열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기간은 '헌법'에서 내각책임제를 선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가의 원수로서 단지 의전과 명목상의 위치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때때로 장면정부에 대하여 질책성의 의견발표도 하였으며, 국민적 의사를 올바르게 대변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이 장면의 민주당 신파와 정면 대립관계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5.16군사혁명이 일어났을 때 '올 것이 왔다.'라는 말을 하였는데, 그뒤이 말을 두고서 박정희(朴正熙)의 군사혁명을 사전에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았으며 상당한 구설수에 오르기도 하였다.
군사혁명 이후 한때 국가의 정통성 계승과 외교관례를 고려하여 대통령직에 있었지만 1962년 3월 23일 국가재건노력을 호소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곧 하야하였다. 그때부터 군사혁명을 일으킨 세력과 맞서서 민정회복을 주장하면서 민주화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특히, 1963년 민정이양을 앞두고 실시된 대통령선거에 민정당(民正黨) 후보자로 출마하여 박정희와 대결하였는데 근소한 차이로 패배하였다. 이 선거의 결과에 대하여 부정선거와 관권선거가 자행되었기 때문에 실패하였다고 생각해서 '내가 사실상 정신적 대통령'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서울특별시 종로구에서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본격적인 야당의 지도자로 활동할 수 있었다.
1965년 민중당(民衆黨)을 창당하였으며 이어서 1966년 신한당(新韓黨)을 창당하고, 당시 야당을 통합 신민당(新民黨)으로 출발하게 되었는데, 이때 대표최고위원에 추대되었다. 그의 이와 같은 야당의 거듭되는 창당과 통합은 당시 군사정부의 야당분리정책으로 인한 이른바 선명논쟁으로 인하여 격렬한 자유민권투쟁을 전개하기 위한 것이었다.
1970년대에는 이른바 유신하에서도 야당투쟁의 지도자로 일해왔으며 민권투쟁에 앞장서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투쟁을 전개함에 있어서 타협보다는 언제나 선명성을 강조하였으며, 박정희 대통령과의 관계는 대단히 적대적이었다. 1979년 야당인 신민당총재 상임고문에 취임하였으나 실제로 정치일선에 앞장서지는 않았다. 특히, 1980년대초부터는 비교적 은둔적인 생활로 들어갔다. 그가 한국 현대정치사에 미친 영향은 민간정부의 민주주의적 정치를 위한 노력에 집중하였다고 할 수 있다.
1990년 7월 18일 자택에서 사망했을 때 국립묘지에 안장되지 않고, 풍수설을 맹신하여 미리 만들어 놓은 충남 아산군 음봉면 동천리 선영에 안장되었다.
1897년 8월 26일 충청남도 아산군 둔포면 신항1리 새말부락에서 중추원의관 윤치소(尹致昭)와 중추원의관을 지낸 전주이씨 이재룡(李載龍, 다른 이름은 이봉하(李鳳夏))의 장녀인 이범숙(李範淑)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부유한 환경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아버지 윤치소는 아산군의 만석꾼이었다. 외가 역시 부유하였는데 어머니 역시 아산의 만석꾼의 딸이었다. 그가 어려서 자란 안국동의 자택 안동장은 99칸의 대저택이었다.
10세 때 집 근처의 교동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1910년 4년 과정의 교동보통소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충무로의 일본인 거류민들이 설립한 일출(日出)소학교에 5학년으로 편입학한 뒤 1912년 일출소학교를 졸업하였다.
1913년 일본으로 유학, 도쿄(東京)로 건너가 스키치의 게이오 의숙(慶應義塾) 의학부에서 공부하다가 1915년 일시 귀국하여 민영환과 6촌인 민영철의 딸 여흥 민씨와 결혼하고 일본으로 되돌아갔다. 1915년말 게이오 의숙 2학년을 중퇴하고 부산항을 통해 되돌아왔다.
귀국해 일본에서 돌아온 여운형을 만난 걸 계기로 여운형을 따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임시정부로 찾아가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19년 3월 13일 그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의원에 특별 선출되었다. 당시 그는 21세로 임시의정원 의원들 중 최연소자였다.
1921년 상하이 생활 3년 만에 중국인 학생을 가장하고 중국을 떠나 영국으로 유학하였다. 젊은 시절 영국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대학에 유학하여 일찍이 해외문물을 접할 수 있었다. 유학 6년 만인 1932년 아내 여흥 민씨를 데리고 귀국한 뒤에는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관여하기보다는 국내의 상황에 관심을 가졌으며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신사 참배령에 불응하는 등 일본 총독통치에 관여 또는 협조하지 않았다.
1945년 광복이 되고 미군이 진주하게 되자 해외에서 공부한 보수적인 인사들과 함께 공산당에 맞서는 한국민주당의 창당에 관여하게 되었으며, 이어 미군정청이 영어를 사용할 수 있는 인사들을 행정요직에 등용하게 되자 미군정청 농상국 고문으로 일하게 되었다. 국내의 정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주로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의 인사들과 깊은 연관을 맺고 활동하였다. 이 시기에 그가 맡았던 중요한 직책은 한영협회 회장과 민중일보사 사장이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서울시장으로 발탁되었으며 곧이어 1949년 상공부장관이 되었다. 그리고 6.25중에는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의 일을 맡았으며 상이군인신생회 회장의 일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단체를 통하여 사변기간 동안 전재아동(戰災兒童)과 상이군인들을 위한 원호활동에 노력하였다. 이어 1953년에 실시된 제3대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1957년 당시 이승만(李承晩) 독재에서 야당의 위치에 있었던 민주당의 중앙위원회 의장에 선임되었다.
1958년 다시 제4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그 다음해 민주당 최고의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1960년 제4대 국회는 제3차 개헌을 통해 의원 내각제(양원제)를 채택하고 해산되었다. 5월 10일의 제5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8월 12일 민의원, 참의원 합동회의에서 출석의원 263명 중 259명의 출석으로 열린 1차 투표에서 208표를 얻은 윤보선은 29표를 얻은 김창숙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당시 민주당은 신익희(申翼熙), 조병옥(趙炳玉) 등 구파의 핵심인사들이 죽고 난 뒤였기 때문에 김도연(金度演)과 함께 사실상 구파의 중심인물로 부상하게 되었다.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부가 물러나고 새롭게 민주당이 집권하게 되었을 때 민주당의 신, 구파 사이에는 집권을 위한 갈등이 심하게 표출되었는데, 이때 구파의 대표적인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신, 구파의 협상에 의하여 대통령으로 선출될 수 있었다. 그리고 같은 자파의 김도연을 국무총리로 선임하였으나 국회인준 획득에 실패하자 신파의 장면(張勉)을 다시 국무총리로 지명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으로 신, 구파는 사실상 분열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기간은 '헌법'에서 내각책임제를 선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가의 원수로서 단지 의전과 명목상의 위치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때때로 장면정부에 대하여 질책성의 의견발표도 하였으며, 국민적 의사를 올바르게 대변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이 장면의 민주당 신파와 정면 대립관계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5.16군사혁명이 일어났을 때 '올 것이 왔다.'라는 말을 하였는데, 그뒤이 말을 두고서 박정희(朴正熙)의 군사혁명을 사전에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았으며 상당한 구설수에 오르기도 하였다.
군사혁명 이후 한때 국가의 정통성 계승과 외교관례를 고려하여 대통령직에 있었지만 1962년 3월 23일 국가재건노력을 호소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곧 하야하였다. 그때부터 군사혁명을 일으킨 세력과 맞서서 민정회복을 주장하면서 민주화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특히, 1963년 민정이양을 앞두고 실시된 대통령선거에 민정당(民正黨) 후보자로 출마하여 박정희와 대결하였는데 근소한 차이로 패배하였다. 이 선거의 결과에 대하여 부정선거와 관권선거가 자행되었기 때문에 실패하였다고 생각해서 '내가 사실상 정신적 대통령'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서울특별시 종로구에서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본격적인 야당의 지도자로 활동할 수 있었다.
1965년 민중당(民衆黨)을 창당하였으며 이어서 1966년 신한당(新韓黨)을 창당하고, 당시 야당을 통합 신민당(新民黨)으로 출발하게 되었는데, 이때 대표최고위원에 추대되었다. 그의 이와 같은 야당의 거듭되는 창당과 통합은 당시 군사정부의 야당분리정책으로 인한 이른바 선명논쟁으로 인하여 격렬한 자유민권투쟁을 전개하기 위한 것이었다.
1970년대에는 이른바 유신하에서도 야당투쟁의 지도자로 일해왔으며 민권투쟁에 앞장서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투쟁을 전개함에 있어서 타협보다는 언제나 선명성을 강조하였으며, 박정희 대통령과의 관계는 대단히 적대적이었다. 1979년 야당인 신민당총재 상임고문에 취임하였으나 실제로 정치일선에 앞장서지는 않았다. 특히, 1980년대초부터는 비교적 은둔적인 생활로 들어갔다. 그가 한국 현대정치사에 미친 영향은 민간정부의 민주주의적 정치를 위한 노력에 집중하였다고 할 수 있다.
1990년 7월 18일 자택에서 사망했을 때 국립묘지에 안장되지 않고, 풍수설을 맹신하여 미리 만들어 놓은 충남 아산군 음봉면 동천리 선영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