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대 대통령 (재임 2008~2013). 아호는 원래 일송(一松)이나 청계(淸溪)로 바꿨다. 경주이씨 국당공파 이후 문정공파 이후 송와공 22세손이다.
1941년 12월 19일에 일본 오사카의 조선인 부락에서 아버지 이충우(李忠雨, 족보상 이름은 이덕쇠,李德釗)와 어머나 채태원 사이의 4남 3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다른 형제들의 이름은 모두 상(相)자 돌림이지만 혼자만"명박"인 이유는 어머니가 보름달이 치마폭에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는 "밝을 명(明), 넓을 박(博)"자를 넣어 지었기 때문이다. 제17대 대선 때 돌림자가 다른 이름 때문에‘형제들과 배가 다르다’는 공격을 받아 DNA 검사까지 받기도 했다. 족보에는 돌림자를 딴‘상정’(相定)으로 이름이 올라 있다.
이충우는 포항시 흥해읍 덕성리가 고향으로 목장 일에 종사했고 결혼 후 1935년 일거리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갔다. 부모가 살던 조선인 부락은 목축장이 유명했던 곳으로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핍박이 극심한 곳이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귀국하여 경상북도 영일군 흥해읍 덕성리 덕실마을에 정착했고 약 2년 정도 거주 후 포항읍내로 이사했다. 고국땅을 밟은 아버지는 귀국 후에도 목장 일에 종사했고 어머니 역시 과일행상에 나섰지만 그의 가족의 생활고는 해결되지 않는 등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54년 포항영흥국민학교를 졸업하고, 포항중학교 시절에는 전교 2등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 수재 소리를 들었지만 도저히 고등학교를 진학할 형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중학교 담임의 적극적인 설득으로, 장학금만으로 다니겠다는 전제 하에 동지상고 야간부에 진학할 수 있었다. 낮에는 수레를 끌고 다니며 뻥튀기, 과일 행상 등으로 생활비를 보태는 어려운 처지 속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1960년 고교 졸업 후 서울로 올라와 합숙소에 들어가 일당노동자 생활을 하며 대학중퇴라도 되고 싶다는 생각에 청계천 헌책방에서 책을 얻어 대입 시험공부를 시작했다.
1961년 고려대경영학과에 합격했고, 이웃들의 도움으로 이태원시장에서 매일 새벽 청소 일을 하는 환경미화원으로 학업을 이어가던 중 생활고를 피해 군대에 입대했으나 기관지확장증으로 진단받아 훈련소에서 강제 퇴소됐다. 3학년 때 상대 학생회장에 당선 한일협정을 반대하는 6.3 시위를 주도했다. 경찰에 체포돼 대법원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6개월간 복역했다.
대학 졸업 후 학생운동 전력으로 취업이 되지 않자 박정희 대통령에게 편지를 써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이에 이낙선 청와대 민정담당 비서관은 현대건설에 이명박의 과거를 문제 삼지 말도록 조치했다. 1965년에 어렵게 현대건설에 입사해 2년 차에 대리, 5년 만에 29세로 이사가 됐고, 12년 만인 1977년엔 37세 나이로 현대건설 사장이 되면서 '샐러리맨의 신화'로 불렸다. 1988년에는 회장에 올랐다. 40대에 대기업 회장이 된 이명박의 성공 스토리는 1989년 KBS 2TV에서'야망의 세월'이란 제목으로 드라마화 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1970년엔 6살 연하의 김윤옥(金潤玉)과 결혼했다.
1992년 1월 정주영이 통일국민당을 창당하고 대통령 후보로 나서면서 이명박은 현대건설 회장직을 그만두고 민주자유당에 입당해 정계에 입문했으며, 14대 전국구 국회의원에 이어 1996년 15대 종로 지역구 국회의원을 지내던 중, 공직선거 및 부정선거방지법위반죄혐의로 피소되어 항소를 진행하던 중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 출마를 위해 의원직을 사퇴했다. 1998년 4월 항소심서 벌금 400만 원 형이 선고돼자 대법원에 항고 했다. 이후 서울시장 후보 경선 출마를 포기하고 미국 조지워싱턴대학으로부터 객원연구원으로 초대를 받아 미국으로 건너갔다.
2002년 민선 3기 32대 서울특별시장에 당선돼 청계천 복원 사업, 서울시 대중 교통 환승체계 구축, 서울숲 조성, 서울광장 조성 등의 업적을 남겼다.
2007년 12월 19일 제17대 대선에서 '실천하는 경제대통령'이라는 슬로건으로 2위인 대통합민주신당의 정동영 후보를 역대 최대 표차인 521만 여표 차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이듬해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를 통해 정부 조직의 대대적인 통폐합안을 발표하고, '작은 정부, 큰 시장'을 뼈대로 '경제살리기'의 기치를 내걸었다.
집권 초 한미 쇠고기협상이 타결되자 MBC PD수첩을 비롯한 일부 언론과 진보 성향의 단체들이 미국산 쇠고기의 인간 광우병 위험성을 과장·왜곡 보도하면서 광우병 사태가 발생했다. 이에 이명박 대통령은 사과하고 30개월 이상 소고기의 수입을 금지하는 재협상을 약속하면서 시위는 잦아들었다. 2008년 5월 2일부터 106일 동안 벌어진 시위로 유무형의 재산피해가 발생되고 해외에서 국가이미지도 손상됐다.
2008년 9월에는 미국발 글로벌금융위기가 발생했다. 글로벌금융위기로 같은 해 4분기 들어 미국과 일본, 유럽 선진국들의 GDP 성장률이 일제히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10월 한 달 동안 아이슬란드, 파키스탄, 우크라이나, 헝가리, 벨로루시 등 5개국이 외환위기를 맞아 IMF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외신들은 한국의 경제를 비관하며 아시아에서는 한국이 제일먼저 국가부도를 맞을 것으로 전망했다. 실제로 한국의 부도위험은 사상 최고수준으로 치솟았다. 이에 대내적으로는 미국, 일본, 중국 등과 통화스와프 체결, 매주 비상경제대책회의 주재, 확장적 재정정책 등을 통한 위기극복에 나섰고, 대외적으로는 G20 정상회의 의장국으로서 글로벌금융위기 극복을 위한 국제공조를 이끌어 냈다. 그 결과 한국은 OECD 국가 중 가장 성공적으로 글로벌금융위기를 극복하며 '위기 통제에 만점을 받아 교과서적인 경제회복을 이루어낸 국가'라는 평가를 외신으로부터 받았다.
2010년 4월에는 유럽발 재정위기가 발생하고 2011년 8월에는 S&P에 의해 미국의 국가신용등급이 강등되면서 세계 경제는 또 한 번의 충격에 빠졌다. 이에 중국, 일본과 맺은 통화스와프를 확대하고 균형재정을 선언하는 등 위기극복에 나섰다. 그 결과 한국은 2012년 8월 무디스, 피치, S&P등 3대 신용평가사로부터 사상 최고의 국가신용등급을 받았고, 특히 피치로부터 받은 국가신용등급은 사상 처음으로 중국과 일본을 앞섰다.
가장 논란이 된 것은 4대강 살리기 사업으로 반대 진영은 경제효과 의문, 녹조 등 환경파괴, 부실공사, 공기업, 부실재정, 유지보수비용, 기업의 입찰담합 등을 주장하며 대대적인 비난에 나섰다. 그러나 2015년에 대법원은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에서 진행된 4대강 사업 모두 적법 판결을 내렸다. 또한 2015년에는 4대강 보의 물을 가뭄지역에 공급하는 사업이 추진되기도 하였다.
대북 정책에 있어서는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 사건(2008년 7월 11일), 천안함피격 사건(2010년 3월 26일), 연평도 포격 사건(2010년 11월 23일) 및 북핵 문제 등과 같은 북한의 도발에 대해 금강산 관광 중단, 5.24조치 실시 등 강력한 대북경제제재를 취하며 국제사회에 공조 하여 대북압박에 나섰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 북한이 대북지원을 요구하며 수차례 집요하게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요구해 왔지만 원칙 있는 대북 정책을 위해 이를 거부했다.
외교정책은 '더 큰 대한민국(Global Korea)'를 국정지표로 삼아 2010년 서울 G20 정상회의, 2011년 부산 원조개발총회, 2012년엔 서울 핵안보정상회의 등을 개최하면서 한국의 글로벌 리더십을 함양했다. 또한 2009년엔 UAE 원전을 수주하면서 세계 6번째로 원전수출국의 반열에 섰으며, 평창동계올림픽 유치, 소말리아 해적을 소탕한 아덴만의 여명작전(2011년 1월 21일) 등 외교 안보적 업적을 남겼다.
대미외교는 임기 중 한미FTA 발효를 통해 60여 년간 이어진 한·미 군사동맹을 '안보+경제'의 포괄동맹으로 진일보 시켰다. 또한 한·미 간 미사일지침 개정을 통해 미사일 사거리를 연장하고, 미국비자 면제 프로그램(VWP) 가입하는 등 한미관계는 강화됐다. 대일외교는 과거를 직시하면서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 구축을 지향했다. 일본 총리로부터 과거사 반성을 담은 간 나오토 총리 담화를 이끌어내고, 조성왕실 의궤를 돌려받는 등 과거사 문제에도 큰 진전이 있었다. 임기 말에는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외교적 노력을 기했으나 일본 총리가 소녀상 철거를 요구하는 등 일본 정부가 점차 우경화 되면서 한일 관계는 악화됐고, 일본정부는 이를 독도방문과 일왕 발언 등으로 책임을 돌렸다.
2013년 2월 24일, 이명박은 5년의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사저로 돌아갔다.
그밖에 해외건설협회 업계 대표회장(1980),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1982), 대한수영연맹 회장(1982), 6·3동지회 회장(1992), 세계한인상공인총연합회 운영이사회장 겸 부회장(1993), 한국청년실업인협회 회장(1993), (재)동아시아연구원 이사장(1994), 제15대 대통령선거 신한국당 서울시 선거대책본부장(1997), 한나라당 혁신위원회 미래경쟁력 분과위원장(2001) 등을 지냈다.
저서로 '6·3 학생운동사'(1994)와 자전 수필집 '신화는 없다'(1995), 수필집 '절망이라지만 나는 희망이 보인다'(2002) 등이 있다. 대통령 표창(1997), 체육훈장 백마장(1982)·거상장(1986), 국민훈장 석류장(1984), 금탑산업훈장(1985), 현정 국토개발상(1987) 등을 받았다.
1941년 12월 19일에 일본 오사카의 조선인 부락에서 아버지 이충우(李忠雨, 족보상 이름은 이덕쇠,李德釗)와 어머나 채태원 사이의 4남 3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다른 형제들의 이름은 모두 상(相)자 돌림이지만 혼자만"명박"인 이유는 어머니가 보름달이 치마폭에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는 "밝을 명(明), 넓을 박(博)"자를 넣어 지었기 때문이다. 제17대 대선 때 돌림자가 다른 이름 때문에‘형제들과 배가 다르다’는 공격을 받아 DNA 검사까지 받기도 했다. 족보에는 돌림자를 딴‘상정’(相定)으로 이름이 올라 있다.
이충우는 포항시 흥해읍 덕성리가 고향으로 목장 일에 종사했고 결혼 후 1935년 일거리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갔다. 부모가 살던 조선인 부락은 목축장이 유명했던 곳으로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핍박이 극심한 곳이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귀국하여 경상북도 영일군 흥해읍 덕성리 덕실마을에 정착했고 약 2년 정도 거주 후 포항읍내로 이사했다. 고국땅을 밟은 아버지는 귀국 후에도 목장 일에 종사했고 어머니 역시 과일행상에 나섰지만 그의 가족의 생활고는 해결되지 않는 등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54년 포항영흥국민학교를 졸업하고, 포항중학교 시절에는 전교 2등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 수재 소리를 들었지만 도저히 고등학교를 진학할 형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중학교 담임의 적극적인 설득으로, 장학금만으로 다니겠다는 전제 하에 동지상고 야간부에 진학할 수 있었다. 낮에는 수레를 끌고 다니며 뻥튀기, 과일 행상 등으로 생활비를 보태는 어려운 처지 속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1960년 고교 졸업 후 서울로 올라와 합숙소에 들어가 일당노동자 생활을 하며 대학중퇴라도 되고 싶다는 생각에 청계천 헌책방에서 책을 얻어 대입 시험공부를 시작했다.
1961년 고려대경영학과에 합격했고, 이웃들의 도움으로 이태원시장에서 매일 새벽 청소 일을 하는 환경미화원으로 학업을 이어가던 중 생활고를 피해 군대에 입대했으나 기관지확장증으로 진단받아 훈련소에서 강제 퇴소됐다. 3학년 때 상대 학생회장에 당선 한일협정을 반대하는 6.3 시위를 주도했다. 경찰에 체포돼 대법원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6개월간 복역했다.
대학 졸업 후 학생운동 전력으로 취업이 되지 않자 박정희 대통령에게 편지를 써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이에 이낙선 청와대 민정담당 비서관은 현대건설에 이명박의 과거를 문제 삼지 말도록 조치했다. 1965년에 어렵게 현대건설에 입사해 2년 차에 대리, 5년 만에 29세로 이사가 됐고, 12년 만인 1977년엔 37세 나이로 현대건설 사장이 되면서 '샐러리맨의 신화'로 불렸다. 1988년에는 회장에 올랐다. 40대에 대기업 회장이 된 이명박의 성공 스토리는 1989년 KBS 2TV에서'야망의 세월'이란 제목으로 드라마화 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1970년엔 6살 연하의 김윤옥(金潤玉)과 결혼했다.
1992년 1월 정주영이 통일국민당을 창당하고 대통령 후보로 나서면서 이명박은 현대건설 회장직을 그만두고 민주자유당에 입당해 정계에 입문했으며, 14대 전국구 국회의원에 이어 1996년 15대 종로 지역구 국회의원을 지내던 중, 공직선거 및 부정선거방지법위반죄혐의로 피소되어 항소를 진행하던 중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 출마를 위해 의원직을 사퇴했다. 1998년 4월 항소심서 벌금 400만 원 형이 선고돼자 대법원에 항고 했다. 이후 서울시장 후보 경선 출마를 포기하고 미국 조지워싱턴대학으로부터 객원연구원으로 초대를 받아 미국으로 건너갔다.
2002년 민선 3기 32대 서울특별시장에 당선돼 청계천 복원 사업, 서울시 대중 교통 환승체계 구축, 서울숲 조성, 서울광장 조성 등의 업적을 남겼다.
2007년 12월 19일 제17대 대선에서 '실천하는 경제대통령'이라는 슬로건으로 2위인 대통합민주신당의 정동영 후보를 역대 최대 표차인 521만 여표 차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이듬해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를 통해 정부 조직의 대대적인 통폐합안을 발표하고, '작은 정부, 큰 시장'을 뼈대로 '경제살리기'의 기치를 내걸었다.
집권 초 한미 쇠고기협상이 타결되자 MBC PD수첩을 비롯한 일부 언론과 진보 성향의 단체들이 미국산 쇠고기의 인간 광우병 위험성을 과장·왜곡 보도하면서 광우병 사태가 발생했다. 이에 이명박 대통령은 사과하고 30개월 이상 소고기의 수입을 금지하는 재협상을 약속하면서 시위는 잦아들었다. 2008년 5월 2일부터 106일 동안 벌어진 시위로 유무형의 재산피해가 발생되고 해외에서 국가이미지도 손상됐다.
2008년 9월에는 미국발 글로벌금융위기가 발생했다. 글로벌금융위기로 같은 해 4분기 들어 미국과 일본, 유럽 선진국들의 GDP 성장률이 일제히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10월 한 달 동안 아이슬란드, 파키스탄, 우크라이나, 헝가리, 벨로루시 등 5개국이 외환위기를 맞아 IMF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외신들은 한국의 경제를 비관하며 아시아에서는 한국이 제일먼저 국가부도를 맞을 것으로 전망했다. 실제로 한국의 부도위험은 사상 최고수준으로 치솟았다. 이에 대내적으로는 미국, 일본, 중국 등과 통화스와프 체결, 매주 비상경제대책회의 주재, 확장적 재정정책 등을 통한 위기극복에 나섰고, 대외적으로는 G20 정상회의 의장국으로서 글로벌금융위기 극복을 위한 국제공조를 이끌어 냈다. 그 결과 한국은 OECD 국가 중 가장 성공적으로 글로벌금융위기를 극복하며 '위기 통제에 만점을 받아 교과서적인 경제회복을 이루어낸 국가'라는 평가를 외신으로부터 받았다.
2010년 4월에는 유럽발 재정위기가 발생하고 2011년 8월에는 S&P에 의해 미국의 국가신용등급이 강등되면서 세계 경제는 또 한 번의 충격에 빠졌다. 이에 중국, 일본과 맺은 통화스와프를 확대하고 균형재정을 선언하는 등 위기극복에 나섰다. 그 결과 한국은 2012년 8월 무디스, 피치, S&P등 3대 신용평가사로부터 사상 최고의 국가신용등급을 받았고, 특히 피치로부터 받은 국가신용등급은 사상 처음으로 중국과 일본을 앞섰다.
가장 논란이 된 것은 4대강 살리기 사업으로 반대 진영은 경제효과 의문, 녹조 등 환경파괴, 부실공사, 공기업, 부실재정, 유지보수비용, 기업의 입찰담합 등을 주장하며 대대적인 비난에 나섰다. 그러나 2015년에 대법원은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에서 진행된 4대강 사업 모두 적법 판결을 내렸다. 또한 2015년에는 4대강 보의 물을 가뭄지역에 공급하는 사업이 추진되기도 하였다.
대북 정책에 있어서는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 사건(2008년 7월 11일), 천안함피격 사건(2010년 3월 26일), 연평도 포격 사건(2010년 11월 23일) 및 북핵 문제 등과 같은 북한의 도발에 대해 금강산 관광 중단, 5.24조치 실시 등 강력한 대북경제제재를 취하며 국제사회에 공조 하여 대북압박에 나섰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 북한이 대북지원을 요구하며 수차례 집요하게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요구해 왔지만 원칙 있는 대북 정책을 위해 이를 거부했다.
외교정책은 '더 큰 대한민국(Global Korea)'를 국정지표로 삼아 2010년 서울 G20 정상회의, 2011년 부산 원조개발총회, 2012년엔 서울 핵안보정상회의 등을 개최하면서 한국의 글로벌 리더십을 함양했다. 또한 2009년엔 UAE 원전을 수주하면서 세계 6번째로 원전수출국의 반열에 섰으며, 평창동계올림픽 유치, 소말리아 해적을 소탕한 아덴만의 여명작전(2011년 1월 21일) 등 외교 안보적 업적을 남겼다.
대미외교는 임기 중 한미FTA 발효를 통해 60여 년간 이어진 한·미 군사동맹을 '안보+경제'의 포괄동맹으로 진일보 시켰다. 또한 한·미 간 미사일지침 개정을 통해 미사일 사거리를 연장하고, 미국비자 면제 프로그램(VWP) 가입하는 등 한미관계는 강화됐다. 대일외교는 과거를 직시하면서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 구축을 지향했다. 일본 총리로부터 과거사 반성을 담은 간 나오토 총리 담화를 이끌어내고, 조성왕실 의궤를 돌려받는 등 과거사 문제에도 큰 진전이 있었다. 임기 말에는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외교적 노력을 기했으나 일본 총리가 소녀상 철거를 요구하는 등 일본 정부가 점차 우경화 되면서 한일 관계는 악화됐고, 일본정부는 이를 독도방문과 일왕 발언 등으로 책임을 돌렸다.
2013년 2월 24일, 이명박은 5년의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사저로 돌아갔다.
그밖에 해외건설협회 업계 대표회장(1980),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1982), 대한수영연맹 회장(1982), 6·3동지회 회장(1992), 세계한인상공인총연합회 운영이사회장 겸 부회장(1993), 한국청년실업인협회 회장(1993), (재)동아시아연구원 이사장(1994), 제15대 대통령선거 신한국당 서울시 선거대책본부장(1997), 한나라당 혁신위원회 미래경쟁력 분과위원장(2001) 등을 지냈다.
저서로 '6·3 학생운동사'(1994)와 자전 수필집 '신화는 없다'(1995), 수필집 '절망이라지만 나는 희망이 보인다'(2002) 등이 있다. 대통령 표창(1997), 체육훈장 백마장(1982)·거상장(1986), 국민훈장 석류장(1984), 금탑산업훈장(1985), 현정 국토개발상(1987) 등을 받았다.
부인 김윤옥과의 사이에 딸 이주연, 이승연, 이수연, 아들 이시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