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대 대통령 (재임 1998~2003). 호는 후광은 김대중의 고향 후광리 마을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김해김씨 안경공파 14세손 이다. 증조부 김태현(金台鉉), 조부 김제호(金濟浩), 아버지 김운식(金雲植)이 각각 경파(京派) 17세손, 18세손, 19세손 항렬자를 사용한다.
1924년 1월 6일에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 하의도에서 아버지 김운식(金雲植)과 어머니 장노도(張齒島, 후에 장수금으로 개명)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김운식에게는 본부인이 있어서 장노도는 첩이 된다. 김대중이 태어날 때 아버지 김운식의 본부인 김순례에게서 이복 형과 누나들이 있었고 그가 태어난 뒤로도 김대의(金大義)와 김대현(金大賢) 2명의 남동생과 여동생 김진찬(金眞贊)이 태어났다.
어머니 장노도는 1911년에 18살의 나이로 제갈성조(諸葛成祚)와 결혼하여 딸 둘을 낳았으나 사별하였고, 1920년에 윤창언의 첩으로 입적하였으나 역시 사별하였다. 그 후 장노도는 첫 남편의 친형인 제갈성복(諸葛成福)의 도움으로 주점을 운영하다 김운식의 첩으로 들어갔다. 이후 1960년에 김운식이 본부인 김순례와 이혼하고, 장노도가 본부인이 되면서 김대중도 적자의 차남이 되었다.
김대중의 출생에 대하여 의혹이 제기되는 경우도 있다. 어머니 장노도의 첫 남편인 제갈성조의 형인 제갈성복이 친부라는 설, 두 번째 남편인 뻐리섬의 윤창언(尹昌彦)이 친부라는 설이 있다. 1988년 7월 18일에 발행한 호적등본에 의하면 김대중은 7살 때 윤창언(尹昌彦)의 서자 윤대만(尹大萬)에서 김운식의 서자 김대중(金大仲)으로 개명 등재되어 있다. 이 때 개명한 김대중의 한자명 金大仲이 金大中으로 개명된 시점은 밝혀진 바가 없다.
김대중의 집안 환경은 그리 좋지 않은 편이었으나, 김대중은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고 성적도 항상 상위권이었다. 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지만 아직 하의도에 학교가 들어서지 않아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1933년 4월 하의보통학교(하의초등학교)에 입학하여, 1937년 4월 하의도에서 목포북교공립심상소학교(목포북교초등학교)로 전학했다. 교육열이 남달랐던 어머니가 하의도의 집과 농토를 다 팔면서까지 아들을 목포로 유학시킨 것이다. 부모는 여관을 운영하면서 공부 뒷바라지에 나섰다. 그 후 일본인 학생들의 따돌림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학업에 전념하여 1937년 수석으로 졸업하여 목포일보 사장상을 받았다. 1939년에는 5년제(중.고등학제) 목포상업학교(목상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은행에 취직하는 것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한 김대중은 학생의 절반가량이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입학해서 3학년 때까지 반장을 할 정도로 뛰어난 통솔력을 보였다. 이때의 죽마고우로 뒷날 신민당 국회의원이 되는 임종기를 만나 평생의 벗으로 지내게 된다.
그는 독서광이면서 정치와 영어에 관심이 많아 작문과 역사 성적이 뛰어났으며 웅변에도 소질을 보였다 한다. 이 탓인지 훗날 그는 서울에서 웅변학원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학원에서 정치적 동지인 김상현과 만나게 된다. 15세가 되던 1938년에 도요타 다이추(일본어: 豊田大中)로 창씨개명을 하였다. 대통령이 된 뒤에도 일본에 올 때마다 상업학교 시절 은사에게 이 이름을 사용했다고 아사히 신문은 보도했다.
대학 진학을 포기한 김대중은 944년 봄에 목포상업학교를 졸업 후엔 일본의 징집을 피하기 위해 목포상선회사에 경리사원으로 입사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종업원단체가 조직한 회사 경영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이 해 여운형이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 목포지부에 참여하여 선전부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그해 9월 건국준비위원회가 해체되자 이채현의 추천으로 김두봉이 1946년 2월에 연안파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창당한 공산주의 정당인 조선신민당에 입당하여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민주청년동맹 목포시 지부에 가입하여 부위원장으로 활동을 병행하였다. 해방 직후 차용애와 만나 결혼하였으나 1959년 병으로 사망 후 1962년 이희호 여사와 재혼을 하였다.
1947년, 장인의 권고에 따라 한민당에 들어가 활동하는 한편 앞서 일했던 선박회사에서의 경험을 살려 연안을 운행하는 화물선 동양해운이라는 회사를 차리고 해운업을 시작한다. 1948년 10월엔 목포일보를 인수하여 1950년 10월까지 사장을 역임했다. 1951년 3월엔 목포해운회사(현 흥국해운) 사장에 취임했고 같은 해 전남해운조합 회장, 한국조선조합 이사로 취임하였다.
한국 전쟁이 끝나고 1954년 3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목포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했다. 낙선 이후 해운회사를 처분하고 상경하여 잡지 '태양'을 발행하면서 웅변학원을 운영했고, 1955년 10월에는 당시 대한민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사상계'에 '한국노동운동의 진로'등 여러편의 글을 기고하며 정계진출의 꿈을 키운다.
1955년 소설가 박화성의 소개로 박순천, 조재천 등과 같은 야당 인사들을 알게 되어 민주당에 입당하게 된다. 1957년 대한웅변협회 부회장에 선출되었으며 당시 한영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김상현을 만나 이후엔 서로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발전한다. 1960년 민의원 재보궐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된 후 1971년까지 6·7·8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63~1967년 민주당·민중당·신민당 대변인, 1968년 신민당 정무위원을 역임하였다.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출마했다. 당시 대선에서 김대중은 539만표를 얻어 634만표를 얻은 박정희에게 패배하였다. 당시 영남의 박정희와 호남의 김대중이 격돌하는 대선의 특성상 선거 운동 과정에서 지역감정 선동이 극심했는데, 일각에서는 이 선거가 대한민국 역사에서 영호남 지역갈등을 부추긴 씨앗이라고 보아 두 정당을 비판하기도 한다.
1971년 5월에는 총선 후보 지원유세 중 김대중이 탄 승용차가 대형 트럭에 들이받히는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그 후유증으로 고관절이 손상되어 평생 지팡이를 짚어야 하는 장애를 입었다. 1973년 유신독재 때는 일본 도쿄에서 중앙정보부원들에게 납치당해 129시간 만에야 서울 자택 부근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이후 가택연금과 동시에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당하였다.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 세력이 군사재판에서 그에게 내란음모 혐의를 씌워 사형을 선고하였으나, 국제사회의 압력으로1982년 석방되어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1985년 2월 8일에 귀국하였다.
1985년에는 김영삼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에 취임했다. 이듬해 1986년에는 신민당 상임고문으로 추대됐으나 당국에 의해서 취임이 저지되었다.
1986년 전두환 정권이 계엄령을 준비하자 11월 5일 조건부 대선 불출마 선언을 하였다. 1987년 4월에는 통일민주당 상임고문으로 있다가 7월 9일 사면복권되었다. 다음날인 7월 10일 동교동 자택 기자회견에서 "나는 대통령이 되는데 관심 없다. 현재로서 불출마 선언은 변함이 없다"라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하루만에 불출마의사를 번복하고, 8월에 통일민주당 상임고문에 취임하였다.
1987년 김영삼과 함께 통일민주당을 창당하였으나 당내 경선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여있던 김대중은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10월 18일 통일민주당을 탈당하여 평화민주당을 창당하며 분열하자 노태우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하게 된다. 김영삼에게도 득표에서 밀려 낙선한 직후 그는 "부정선거를 저지르지 않았으면 내가 이겼을 것"임을 주장하였고, 투쟁하겠다고 발표했다.
1988년 4월 평화민주당 소속으로 제13대 국회의원(전국구)이 되었고 1991년 9월 통합야당인 민주당을 창당하여 공동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89년 1월 9일 일본 왕 히로히토가 사망하자 당시 평화민주당 총재를 역임 중이던 김대중은 주한 일본 대사관저에 마련된 분향소에서 히로히토 영정 앞에 머리를 숙여 조문했다.
1992년 12월 제14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였으나 3당 합당을 한 김영삼에게 패배하게 된다. 그는 선거 결과에 승복하며 12월 19일에 정계 은퇴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국회의원직을 사퇴하는 동시에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이후 1993년 영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1년 동안 연구활동을 하였고 1994년 귀국, 아태평화재단을 조직하여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면서 당시 민주당의 최대 계파인 동교동계의 막후인물로서 영향력을 행사했고, 1995년 6월에 실시된 지방자치단체 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민주당을 승리로 이끌었다. 같은해 7월 18일 정계복귀를 선언함과 동시에 민주당 탈당파 동교동계 국회의원 54명과 함께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 총재가 됨으로써 제1야당의 총수로 정치활동을 재개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참패 후 1997년 10월 내각제 개헌을 약속하며 자민련의 총재였던 김종필, 박태준과 후보 단일화에 합의하고 12월 15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되어 1998년 2월 제15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98년 12월,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과 중국 및 일본과의 정상회담을 갖는 등 활발한 외교활동을 벌였으며, 1997년 11월부터 시작된 IMF(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의 외환위기를 재정·금융 긴축과 대외개방, 금융 및 기업의 구조조정 등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였다.
1999년 5월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 50인' 중 공동 1위에 선정되었으며, 6월에는 미국 경제 주간 '비즈니스위크'가 선정하는 '아시아개혁을 주도하는 지도자 50인'에 선정되었다. 2000년 1월 자유민주연합과의 내각제 개헌논의를 유보하고, 새천년민주당을 출범시켜 초대 총재에 취임하였다.
2000년 6월 13~15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대로 평양을 방문하여 6·15남북공동선언을 이끌어냈다. 또한 동아시아와 한국에서 민주주의와 인권향상 그리고 50여 년간 지속되어 온 북한과의 평화와 화해를 위하여 노력한 공로로 200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2003년 2월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자연인으로 돌아왔다. 퇴임 이후 그는 정기적으로 신장투석을 받는 상황에서도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국제적인 지도자로서 활발한 대외 활동을 전개했다. 김대중은 국내외의 각종 언론 인터뷰와 강연 등을 통해 한반도의 평화 정착과 동북아 및 세계 평화를 위한 각종 구상을 발표했다.
2009년 7월 13일 흡인성 폐렴 증세로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였다. 병세가 호전되기도 했으나 점차 악화되어 결국 2009년 8월 18일 오후 1시 43분 8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자녀는 3남 1녀가 있는데 부인 차용애와의 사이에서 김소희(金昭熙), 김홍일(金弘一), 김홍업(金弘業) 그리고 이희호와의 사이에 김홍걸(金弘傑)이 있다.
1924년 1월 6일에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 하의도에서 아버지 김운식(金雲植)과 어머니 장노도(張齒島, 후에 장수금으로 개명)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김운식에게는 본부인이 있어서 장노도는 첩이 된다. 김대중이 태어날 때 아버지 김운식의 본부인 김순례에게서 이복 형과 누나들이 있었고 그가 태어난 뒤로도 김대의(金大義)와 김대현(金大賢) 2명의 남동생과 여동생 김진찬(金眞贊)이 태어났다.
어머니 장노도는 1911년에 18살의 나이로 제갈성조(諸葛成祚)와 결혼하여 딸 둘을 낳았으나 사별하였고, 1920년에 윤창언의 첩으로 입적하였으나 역시 사별하였다. 그 후 장노도는 첫 남편의 친형인 제갈성복(諸葛成福)의 도움으로 주점을 운영하다 김운식의 첩으로 들어갔다. 이후 1960년에 김운식이 본부인 김순례와 이혼하고, 장노도가 본부인이 되면서 김대중도 적자의 차남이 되었다.
김대중의 출생에 대하여 의혹이 제기되는 경우도 있다. 어머니 장노도의 첫 남편인 제갈성조의 형인 제갈성복이 친부라는 설, 두 번째 남편인 뻐리섬의 윤창언(尹昌彦)이 친부라는 설이 있다. 1988년 7월 18일에 발행한 호적등본에 의하면 김대중은 7살 때 윤창언(尹昌彦)의 서자 윤대만(尹大萬)에서 김운식의 서자 김대중(金大仲)으로 개명 등재되어 있다. 이 때 개명한 김대중의 한자명 金大仲이 金大中으로 개명된 시점은 밝혀진 바가 없다.
김대중의 집안 환경은 그리 좋지 않은 편이었으나, 김대중은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고 성적도 항상 상위권이었다. 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지만 아직 하의도에 학교가 들어서지 않아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1933년 4월 하의보통학교(하의초등학교)에 입학하여, 1937년 4월 하의도에서 목포북교공립심상소학교(목포북교초등학교)로 전학했다. 교육열이 남달랐던 어머니가 하의도의 집과 농토를 다 팔면서까지 아들을 목포로 유학시킨 것이다. 부모는 여관을 운영하면서 공부 뒷바라지에 나섰다. 그 후 일본인 학생들의 따돌림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학업에 전념하여 1937년 수석으로 졸업하여 목포일보 사장상을 받았다. 1939년에는 5년제(중.고등학제) 목포상업학교(목상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은행에 취직하는 것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한 김대중은 학생의 절반가량이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입학해서 3학년 때까지 반장을 할 정도로 뛰어난 통솔력을 보였다. 이때의 죽마고우로 뒷날 신민당 국회의원이 되는 임종기를 만나 평생의 벗으로 지내게 된다.
그는 독서광이면서 정치와 영어에 관심이 많아 작문과 역사 성적이 뛰어났으며 웅변에도 소질을 보였다 한다. 이 탓인지 훗날 그는 서울에서 웅변학원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학원에서 정치적 동지인 김상현과 만나게 된다. 15세가 되던 1938년에 도요타 다이추(일본어: 豊田大中)로 창씨개명을 하였다. 대통령이 된 뒤에도 일본에 올 때마다 상업학교 시절 은사에게 이 이름을 사용했다고 아사히 신문은 보도했다.
대학 진학을 포기한 김대중은 944년 봄에 목포상업학교를 졸업 후엔 일본의 징집을 피하기 위해 목포상선회사에 경리사원으로 입사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종업원단체가 조직한 회사 경영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이 해 여운형이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 목포지부에 참여하여 선전부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그해 9월 건국준비위원회가 해체되자 이채현의 추천으로 김두봉이 1946년 2월에 연안파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창당한 공산주의 정당인 조선신민당에 입당하여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민주청년동맹 목포시 지부에 가입하여 부위원장으로 활동을 병행하였다. 해방 직후 차용애와 만나 결혼하였으나 1959년 병으로 사망 후 1962년 이희호 여사와 재혼을 하였다.
1947년, 장인의 권고에 따라 한민당에 들어가 활동하는 한편 앞서 일했던 선박회사에서의 경험을 살려 연안을 운행하는 화물선 동양해운이라는 회사를 차리고 해운업을 시작한다. 1948년 10월엔 목포일보를 인수하여 1950년 10월까지 사장을 역임했다. 1951년 3월엔 목포해운회사(현 흥국해운) 사장에 취임했고 같은 해 전남해운조합 회장, 한국조선조합 이사로 취임하였다.
한국 전쟁이 끝나고 1954년 3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목포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했다. 낙선 이후 해운회사를 처분하고 상경하여 잡지 '태양'을 발행하면서 웅변학원을 운영했고, 1955년 10월에는 당시 대한민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사상계'에 '한국노동운동의 진로'등 여러편의 글을 기고하며 정계진출의 꿈을 키운다.
1955년 소설가 박화성의 소개로 박순천, 조재천 등과 같은 야당 인사들을 알게 되어 민주당에 입당하게 된다. 1957년 대한웅변협회 부회장에 선출되었으며 당시 한영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김상현을 만나 이후엔 서로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발전한다. 1960년 민의원 재보궐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된 후 1971년까지 6·7·8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63~1967년 민주당·민중당·신민당 대변인, 1968년 신민당 정무위원을 역임하였다.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출마했다. 당시 대선에서 김대중은 539만표를 얻어 634만표를 얻은 박정희에게 패배하였다. 당시 영남의 박정희와 호남의 김대중이 격돌하는 대선의 특성상 선거 운동 과정에서 지역감정 선동이 극심했는데, 일각에서는 이 선거가 대한민국 역사에서 영호남 지역갈등을 부추긴 씨앗이라고 보아 두 정당을 비판하기도 한다.
1971년 5월에는 총선 후보 지원유세 중 김대중이 탄 승용차가 대형 트럭에 들이받히는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그 후유증으로 고관절이 손상되어 평생 지팡이를 짚어야 하는 장애를 입었다. 1973년 유신독재 때는 일본 도쿄에서 중앙정보부원들에게 납치당해 129시간 만에야 서울 자택 부근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이후 가택연금과 동시에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당하였다.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 세력이 군사재판에서 그에게 내란음모 혐의를 씌워 사형을 선고하였으나, 국제사회의 압력으로1982년 석방되어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1985년 2월 8일에 귀국하였다.
1985년에는 김영삼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에 취임했다. 이듬해 1986년에는 신민당 상임고문으로 추대됐으나 당국에 의해서 취임이 저지되었다.
1986년 전두환 정권이 계엄령을 준비하자 11월 5일 조건부 대선 불출마 선언을 하였다. 1987년 4월에는 통일민주당 상임고문으로 있다가 7월 9일 사면복권되었다. 다음날인 7월 10일 동교동 자택 기자회견에서 "나는 대통령이 되는데 관심 없다. 현재로서 불출마 선언은 변함이 없다"라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하루만에 불출마의사를 번복하고, 8월에 통일민주당 상임고문에 취임하였다.
1987년 김영삼과 함께 통일민주당을 창당하였으나 당내 경선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여있던 김대중은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10월 18일 통일민주당을 탈당하여 평화민주당을 창당하며 분열하자 노태우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하게 된다. 김영삼에게도 득표에서 밀려 낙선한 직후 그는 "부정선거를 저지르지 않았으면 내가 이겼을 것"임을 주장하였고, 투쟁하겠다고 발표했다.
1988년 4월 평화민주당 소속으로 제13대 국회의원(전국구)이 되었고 1991년 9월 통합야당인 민주당을 창당하여 공동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89년 1월 9일 일본 왕 히로히토가 사망하자 당시 평화민주당 총재를 역임 중이던 김대중은 주한 일본 대사관저에 마련된 분향소에서 히로히토 영정 앞에 머리를 숙여 조문했다.
1992년 12월 제14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였으나 3당 합당을 한 김영삼에게 패배하게 된다. 그는 선거 결과에 승복하며 12월 19일에 정계 은퇴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국회의원직을 사퇴하는 동시에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이후 1993년 영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1년 동안 연구활동을 하였고 1994년 귀국, 아태평화재단을 조직하여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면서 당시 민주당의 최대 계파인 동교동계의 막후인물로서 영향력을 행사했고, 1995년 6월에 실시된 지방자치단체 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민주당을 승리로 이끌었다. 같은해 7월 18일 정계복귀를 선언함과 동시에 민주당 탈당파 동교동계 국회의원 54명과 함께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 총재가 됨으로써 제1야당의 총수로 정치활동을 재개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참패 후 1997년 10월 내각제 개헌을 약속하며 자민련의 총재였던 김종필, 박태준과 후보 단일화에 합의하고 12월 15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되어 1998년 2월 제15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98년 12월,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과 중국 및 일본과의 정상회담을 갖는 등 활발한 외교활동을 벌였으며, 1997년 11월부터 시작된 IMF(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의 외환위기를 재정·금융 긴축과 대외개방, 금융 및 기업의 구조조정 등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였다.
1999년 5월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 50인' 중 공동 1위에 선정되었으며, 6월에는 미국 경제 주간 '비즈니스위크'가 선정하는 '아시아개혁을 주도하는 지도자 50인'에 선정되었다. 2000년 1월 자유민주연합과의 내각제 개헌논의를 유보하고, 새천년민주당을 출범시켜 초대 총재에 취임하였다.
2000년 6월 13~15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대로 평양을 방문하여 6·15남북공동선언을 이끌어냈다. 또한 동아시아와 한국에서 민주주의와 인권향상 그리고 50여 년간 지속되어 온 북한과의 평화와 화해를 위하여 노력한 공로로 200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2003년 2월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자연인으로 돌아왔다. 퇴임 이후 그는 정기적으로 신장투석을 받는 상황에서도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국제적인 지도자로서 활발한 대외 활동을 전개했다. 김대중은 국내외의 각종 언론 인터뷰와 강연 등을 통해 한반도의 평화 정착과 동북아 및 세계 평화를 위한 각종 구상을 발표했다.
2009년 7월 13일 흡인성 폐렴 증세로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였다. 병세가 호전되기도 했으나 점차 악화되어 결국 2009년 8월 18일 오후 1시 43분 8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자녀는 3남 1녀가 있는데 부인 차용애와의 사이에서 김소희(金昭熙), 김홍일(金弘一), 김홍업(金弘業) 그리고 이희호와의 사이에 김홍걸(金弘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