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김영삼(金泳三)
  • 김녕김씨(金寧金氏),  출생~사망 : 1927 ~ 2015
제14대 대통령 (재임 1993~1998). 정치가. 호는 거산(巨山). 김녕김씨 충정공파 28세손이다.

1927년 12월 20일에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 외포리에서 아버지 김홍조(金洪祚)와 어머니 박부련(朴富連) 사이에서 1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 박부련은 1960년 무장공비 2명에 의해 살해되었고, 이후 아버지는 최남순(崔南順)과 재혼하였으나 그녀 역시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 후 김홍조는 1985년 75세에 13살 연하였던 이수남(李守南)과 재혼하였다. 그가 태어날 무렵 김홍조는 어선을 10여 척 이상 보유하였으며 멸치 어장을 꾸려가는 인근 마을에서는 꽤 알려진 부자 집안이었다.

1943년 통영중학교에 입학한 뒤 1945년 11월 경남중학교로 전학했다. 이때부터 그는 대통령이 되기로 결심하고 자신의 장래 희망을 물으면 대통령이라 대답하였다고 한다. 이때 자신의 책상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는 글씨를 늘 써놓곤 했다. 1947년 경남중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했다.

대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50년 5월 김영삼은 장택상의 국회의원 총선거 선거운동원으로 활동하였고, 1951년에는 국회의원 장택상의 비서관이 되었다. 1951년 3월 마산문창교회에서 경향고무를 경영하던 손상호의 딸 손명순(孫命順)과 결혼식을 올리고 2남 3녀를 가졌다. 1951년 5월 장택상이 국무총리에 취임하자 김영삼은 국무총리실 인사담당 비서관이 되었다.

1954년 이기붕의 권유로 자유당에 입당하고 제3대 민의원 선거에 거제지역구에서 출마해 만 26세의 나이로 당선되어 역대 최연소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후 9선 국회의원을 지내며 유신정권의 야당 지도자로서 민주당 원내총무, 민정당 대변인, 신민당 원내총무로 활동하며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 김영삼 초산 테러 사건 등의 탄압을 받았다. 1979년 10월에는 YH 무역 여공 농성 사건 이후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에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것을 주장하였다. 유신정권은 이 발언을 문제삼아 의원직 제명 파동을 일으켜 부마항쟁을 촉발했다. 1983년에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기념일을 기해 23일 동안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6월 민주 항쟁 이후 통일민주당 총재로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구성해 민주진영을 구축했다. 1986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1천만 서명운동을 전개하였다.

1987년 김대중과 함께 통일민주당을 창당하였으나 당내 경선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여있던 김대중은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10월 18일 통일민주당을 탈당하여 평화민주당을 창당하며 분열하자 노태우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비운을 겪게 된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부산, 경상남도 지역에서만 압승을 거뒀을 뿐 수도권 지역에서는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에 패배하면서 제2야당으로 밀려났다. 그해 4월에는 인권변호사로 유명한 노무현을 정치계에 발탁하기도 하였다. 이후 김영삼은 노무현을 전폭적으로 지원했으나 1990년 3당 합당과정에서 노무현이 반대하면서 결별하게 된다.

1990년 여소야대 정국에서 위기감을 느끼던 노태우 대통령의 민주정의당, 제2야당의 지위에 불만족을 느끼던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내각제 개헌을 노리던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물밑 협상 끝에 1990년 1월에 전격적으로 합당하여 민주자유당을 창당하였다. 3당 합당 과정에는 노태우, 김종필 등과 내각제 이면합의가 있었으나 김영삼은 노태우를 압박하여 이를 백지화하였고, 일부 민정계와 공화계 의원들의 반발을 누르고, 5월 18일에 민자당 대표 최고위원에 취임하였고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1992년 12월 18일 14대 대선 당시 선거는 김영삼, 김대중, 정주영 후보의 3파전으로 격돌하였으나 김대중을 193만표차로 꺾고 당선하여 1993년 제14대 대통령에 취임하며 32년만에 군사 정권의 마침표를 찍었고, 문민 정부를 열었다.

1993년 취임 초부터 북한과 연락, 김일성과의 남북정상회담을 요구하여 호응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94년 7월에 김일성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남북정상회담은 무산되었다. 1994년 여름, 미국의 빌 클린턴 행정부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변 원자로 시설에 대한 정밀폭격을 검토하자 그는 이에 대한 강경한 반대입장을 펴서 저지하였다고 전해진다.

대통령 재임 기간 중 경제비리와 부패의 온상인 금융차명 이나 재산은닉을 방지하기 위해 금융실명제를 실시하였고, 토지거래실명제를 하여 부동산 가격의 안정과, 과도한 토지겸병을 방지하는데 기여하였다. 지방자치제를 전면 실시했다. 예술인과 작가들의 반정부와 사회비판을 전면 허용하였고 군사 정권에 의해 수감된 박노해, 김남주, 마광수 등의 문학가를 석방하여 표현의 자유를 대폭 허용하였다.

1993년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폭파 철거하였고, 국군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척결했다. 율곡 비리에 과감하게 손을 댔고, 또한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을 수사하여 처벌하였고, 군사반란과 5.17 쿠데타 및 5.18 민주화 운동 진압의 책임을 물어 군사 정권 관계자들을 사법처리하였다.

1996년 12월에는 '선진국 클럽'인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에 가입, 아시아 국가로는 일본에 이어 2번째로 OECD 회원국이 되었다. 1996년 10월에는 북한 무장 간첩단이 잠수함을 타고 강원도 강릉시에 침투하였으나 일원이었던 이광수가 현장에서 생포되었으며 나머지 조직원들은 자살하였다.

1997년 1월부터 한보 철강, 기아자동차 등의 도미노식 부도 사태가 발생했다. 이때 한보회장 정태수는 구속되었고 한보사태 수사중 김영삼의 아들 김현철의 권력형 비리가 드러나고 뇌물수수 및 권력남용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김영삼은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하였다. 결국 1997년 경제시장 악화와 함께 외환위기로 IMF 구제 금융을 불러오면서 비판을 사게 되었다.

1998년 2월 24일 김대중에게 대통령직을 물려주고 상도동 자택으로 퇴임하였다. 대통령직 퇴임 이후에도 꾸준히 정치활동을 하였다. 그는 민주자유당과 신한국당의 지도자 및 민주당계 정당의 상도동계 지도자로 여야에 영향력을 고루 미쳤다. 한편 박정희, 전두환, 김대중, 노무현, 김구 등에게 비판적인 자세를 유지했으나, 이승만 및 이명박에게 긍정적이며 호의적인 평가와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제18대 총선 공천에서 자신의 측근이 대거 탈락하자 간접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많은 인재를 발탁하여 정치에 입문시키도 했는데 서석재, 김덕룡, 김동영, 최형우, 노무현, 이재오, 김문수, 제정구, 손학규, 김무성, 홍사덕 등을 발탁하였다.

2015년 11월 22일 0시 22분 서울대학교병원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던 중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는 대한민국 최초로 5일 국가장으로 거행되었으며, 서울특별시 동작구의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