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전두환(全斗煥)
  • 완산전씨(完山全氏),  출생~사망 : 1931 ~ 2021
제11대, 제12대 대통령 (재임 1980~1988). 군인. 호는 일해(日海). 경상남도 합천출생. 완산전씨 23세손이다.

1931년 1월 18일에 경상남도 합천에서 아버지 전상우(全相禹)와 어머니 김점문(金點文) 사이에서 6남 4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계는 몰락한 양반으로 13대조인 전제가 임진 왜란 때 영산현감으로 일본군과 싸우다 권율의 명령을 어겼다며 처형당했고 이후 무관이 몇 명 배출됐지만 한동안 벼슬에 나가지 못한 상태였다.

아버지는 가난한 농부였으나 마을 구장을 지낼 만큼 상당한 한문 지식이 있었다. 약간의 의학 지식도 갖추고 있던 그는 정식 진료소를 차릴 수준은 아니었으나 마을 주민들을 민간요법으로 치료하기도 했다. 전두환은 이런 아버지의 성격을 닮았다. 그리고 의리가 강해 전두환이 9살이던 1939년에 동네 노름꾼 지인의 보증을 서주느라 문중의 종토(宗土)를 저당잡혔다. 이 종토를 돌려받는 과정에서 합천 읍내 주재소 순사부장의 소환을 받았으나 이리저리 피해 다니며 지냈다.

어머니 김점문은 자녀들 중 전두환에 대한 기대가 강했다. 아들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강했는지 지나가는 승려를 대접해준 뒤, 그 승려로부터 '어머니의 튀어나온 앞니가 아들의 운세를 가로막고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김점문은 부엌으로 달려가 쇠 집게로 생니 3개를 뽑을 정도였다고 한다.

유년기에 근처 서당에 다니며 한학을 수학했다. 5세 되던 해 그의 가정은 합천에서 대구로 이사했다. 이후 전두환은 7세 되던 1937년에 희도소학교에 입학했다. 유년기의 전두환은 학업성적이 우수했지만, 4학년 때 소학교를 휴학해야 했다. 셋방살이를 하면서 10대 초반인 그는 일본인 식품공장에서 낫토 배달, 약전골목에서 약 배달 같은 일을 하면서 가정의 생계를 부양하기도 했다. 생계와 학업을 병행하느라 그의 성적은 좋지 못했다. 아버지 전상우는 만주에서 배운 한의술로 한의원을 개업했으나, 정식으로 배운 한의학이 아니라서 손님들의 발길은 뜸했고,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수준이었다.

1944년 3월 25일 15세에 희도국민학교를 졸업하였다. 아버지의 만주 망명 때문에 전두환은 또래들보다 1년 늦게 국민학교를 졸업했고 그해 중학생이 된 전두환은 권투를 시작했고 중학교 권투부 부원이 되었다. 그는 학교에 갈 때마다 어깨에 권투장갑이 매달려 있었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10킬로미터 거리였지만 그는 왕복 20km의 길을 직접 걸어서 통학하였다. 재학 당시 우수한 성적이었다.

1951년 대구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5년 육군사관학교를 제11기로 졸업하였다. 1959년 육군 부관 학교(군사 영어반)를 거쳐 1960년 미국에 유학, 미국 보병 학교를 수료하였고, 1961년 5·16군사정변 직후 박정희에게 발탁되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민원비서관, 1963년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1969년 육군본부 수석부관을 지냈다.

1970년 백마부대 제29연대장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였고, 1971년 제1공수특전단 단장을 지냈다. 1976년 대통령 경호실 차장보, 1978년 제1사단장을 지낸 후 1979년 초 국군보안사령관이 되었다.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박정희가 사망하자 12월 12일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체포하고, 신군부가 12·12군사정변을 일으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80년 중장으로 진급하고, 이어 중앙정보부장 서리가 되었다. 5·17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와 함께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강제로 진압하고 정권을 장악한 뒤, 그해 6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고 상임위원장이 되었다. 이어 8월 5일 대장으로 진급하고, 22일 예편하였으며,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선으로 제11대 대통령에 선출되어 9월 1일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81년 1월 창당된 민주정의당의 총재가 되어 2월 개정된 새헌법에 따라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제5공화국 출범의 주역이 되었으며, 민주주의의 토착화, 복지 사회의 건설, 정의 사회의 실현, 교육혁신과 문화 창달을 4대 국정 지표로 제시하고 강한 개혁 의지를 천명하기도 하였다.

1983년 10월 9일 동남아시아 국가 순방 기간에 순방국 하나인 버마(미얀마)의 아웅산묘소 참배 도중 북한 공작원들에 의한 폭탄 테러 사건으로 이범석, 서석준, 심상우, 함병춘 등 80명의 외교관과 취재진 및 현지 안내인이 피폭으로 즉사했다.

이후 남북관계는 경색되었지만 밀사교환을 통한 정상회담을 추진하고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단 교환(85년)을 실현시키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1999년 김대중 정부 시절에 '남북 통일이라는 민족적 성업에 몸과 마음을 바치고 싶다'고 신념을 밝히고 자신이 대북특사를 맡고 싶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혔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적당하지 않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1984년 8월 20일 전두환은 갑자기 남북간 물자교역 및 경제협력 제의, 대북기술·물자 무상제공도 하겠다고 발표한다. 그리고 1985년 1월 9일 전두환은 서울·평양 상주연락대표부 설치를 제의하고 1985년 9월 20일부터 9월 24일 대대적으로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 동시 교환방문(상봉가족 65가족 92명)을 하였다.

1987년 11월 29일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출발한 KAL 858기가 인도양 상공에서 북한공작원에 의하여 공중 폭파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여객기 폭파후 두 폭파범은 1987년 12월 1일 바레인 공항에서 조사를 받던 중 김승일은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으며, 김현희는 대한민국으로 압송되었다.

1987년 6월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견디다 못해 결국 수용하고 노태우(盧泰愚)를 차기 대통령 후보로 추천하였다. 1988년 3월 유럽의 관계자들은 전두환이 재임 중 발생한 안전보장상의 중대한 위기, 83년의 아웅산 묘소 폭파 암살미수 사건, 87년의 KAL기 폭파추락사건 등을 평화적으로 해결, 한반도의 평화유지에 공헌했다는 점 을 들어 그를 노벨 평화상 후보자의 한 사람으로 추천하기도 했다.

1988년 2월 제6공화국에 정권을 이양하고, 광주민주화운동과 5공비리문제로 책임추궁을 당하다가 1988년 11월부터 1990년 말까지 강원도 설악산 백담사로 거처를 옮기고 은둔생활을 했다. 1996년 12·12 및 5·18사건, 비자금사건과 관련되어 사법처리되었다.

전두환에 대한 평가는 현재 극과 극이며 그의 평가에 따라 대한민국의 극우주의와 진보주의 및 보수주의를 가르는 척도 중의 하나로 통용되기도 한다. 광주민주화운동 학살자, 군부 독재자라는 혹평에서부터 구국의 영웅이라는 평가가 존재한다. 재임기간 중 물가안정, 무역흑자 등 경제회생 노력을 기울인 점과 1986년 아시안 게임(1981년 11월 26일), 1988년 서울 올림픽(1982년 9월 30일)을 성공적으로 유치한 점 등이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부인 이순자의 사이에 세 아들 재국, 재용, 재만과 딸 효선을 두었다.
다발성 골수종 지병으로 투병 중 2021년 11월 23일 오전 8시40분경 연희동 자택서 별세했다. 향년 90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