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대 대통령 (재임 1979~1980). 제12대 국무총리. 정치가, 외교관. 호는 현석(玄石), 자는 서옥(瑞玉). 강릉최씨 매창공파 33세손이다.
1919년 7월 16일 강원도 원주군 원주면 봉산리에서 최양오(崔養吾)와 어머니 이응선(전주이씨) 사이에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워 동몽선습, 효경 등을 시작하여 소학, 논어, 맹자, 대학, 중용, 통감 등을 읽었다. 1928년 원주보통학교에 10세 때 원주보통학교에 3학년으로 월반 입학했다. 1932년 2월 원주보통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할아버지에게 문과 예절을 배우는 가정학습은 계속되었다. 1932년 상경하여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를 다녔고, 1935년 부모의 뜻에 따라 홍기(洪基)와 결혼했다. 그 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도쿄고등사범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으며, 1941년 졸업 뒤에는 만주로 건너가 국립대동학원에서 만주국의 수습관료로 근무했다.
해방 이후에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로 있다가 1946년 미군정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발탁되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농림행정에 종사하여 농림부 양정과장, 농지관리국장 서리 등을 지냈다. 1951년 변영태에게 발탁되어 외무부 통상국장으로 자리를 옮겨 1951년 아시아 극동경제위원회(ECAFE)에 한국의 수석대표로 참석했다. 1952년에는 도쿄 주일대표부 총영사로 부임했으며, 1959년에는 주일대표부 공사로 승진했다. 그리고 그해 9월 귀국하여 외무부 차관이 되었고, 12월부터 외무부장관 직무대행을 겸하였다.
1960년 4.19혁명 이후에는 외무부 차관에서 사임하였고, 공민권 제한 대상자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5.16군사정변 이후에는 김종필이 주도한 민주공화당 창당준비에 참여하였고, 19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인 박정희의 외교담당 고문이 되었다. 그 뒤 1964년부터 말레이시아 대사로 파견되었다가 1967년 귀국하여 외무부장관이 되었다. 1971년에는 대통령 외교담당 특별보좌관으로 임명되었고, 1972년에는 남북조절위원회 위원으로 평양을 방문하였다.
1975년 국무총리 서리를 거쳐 1976년 3월 국무총리로 임명되었다. 국무총리로 재직하던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되자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하여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리고 10월 28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를 해임하고, 전두환을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했다.
1979년 11월 6일에는 유신헌법에 따라 새 대통령을 선출한 뒤에 빠른 시일 안에 헌법을 개정하겠다는 ‘시국에 관한 담화’를 발표하였고, 그해 12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전두환 등 신군부의 압력으로 1980년 8월 16일 8개월 만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한국 헌정사상 정당에 관여하지 않은 직업공무원으로서 과장·국장·차관·장관·국무총리를 차례로 거쳐 대통령이 된 첫번째 사람이다.
1981~88년 국정자문회의 의장을 지냈으며, 1991년부터 1993년까지는 민족사바로찾기국민회의 의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2006년 10월 22일,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1919년 7월 16일 강원도 원주군 원주면 봉산리에서 최양오(崔養吾)와 어머니 이응선(전주이씨) 사이에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워 동몽선습, 효경 등을 시작하여 소학, 논어, 맹자, 대학, 중용, 통감 등을 읽었다. 1928년 원주보통학교에 10세 때 원주보통학교에 3학년으로 월반 입학했다. 1932년 2월 원주보통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할아버지에게 문과 예절을 배우는 가정학습은 계속되었다. 1932년 상경하여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를 다녔고, 1935년 부모의 뜻에 따라 홍기(洪基)와 결혼했다. 그 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도쿄고등사범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으며, 1941년 졸업 뒤에는 만주로 건너가 국립대동학원에서 만주국의 수습관료로 근무했다.
해방 이후에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로 있다가 1946년 미군정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발탁되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농림행정에 종사하여 농림부 양정과장, 농지관리국장 서리 등을 지냈다. 1951년 변영태에게 발탁되어 외무부 통상국장으로 자리를 옮겨 1951년 아시아 극동경제위원회(ECAFE)에 한국의 수석대표로 참석했다. 1952년에는 도쿄 주일대표부 총영사로 부임했으며, 1959년에는 주일대표부 공사로 승진했다. 그리고 그해 9월 귀국하여 외무부 차관이 되었고, 12월부터 외무부장관 직무대행을 겸하였다.
1960년 4.19혁명 이후에는 외무부 차관에서 사임하였고, 공민권 제한 대상자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5.16군사정변 이후에는 김종필이 주도한 민주공화당 창당준비에 참여하였고, 19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인 박정희의 외교담당 고문이 되었다. 그 뒤 1964년부터 말레이시아 대사로 파견되었다가 1967년 귀국하여 외무부장관이 되었다. 1971년에는 대통령 외교담당 특별보좌관으로 임명되었고, 1972년에는 남북조절위원회 위원으로 평양을 방문하였다.
1975년 국무총리 서리를 거쳐 1976년 3월 국무총리로 임명되었다. 국무총리로 재직하던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되자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하여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리고 10월 28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를 해임하고, 전두환을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했다.
1979년 11월 6일에는 유신헌법에 따라 새 대통령을 선출한 뒤에 빠른 시일 안에 헌법을 개정하겠다는 ‘시국에 관한 담화’를 발표하였고, 그해 12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전두환 등 신군부의 압력으로 1980년 8월 16일 8개월 만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한국 헌정사상 정당에 관여하지 않은 직업공무원으로서 과장·국장·차관·장관·국무총리를 차례로 거쳐 대통령이 된 첫번째 사람이다.
1981~88년 국정자문회의 의장을 지냈으며, 1991년부터 1993년까지는 민족사바로찾기국민회의 의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2006년 10월 22일,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