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이승만(李承晩)
  • 전주이씨(全州李氏),  출생~사망 : 1875 ~ 1965
제1~3대 대통령 (재임 1948~1960). 독립운동가. 초명은 승룡(承龍). 호는 우남(雩南). 본관은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양녕대군의 16세손(시조로부터 40세손)이다.

이승만은 1875년 4월 18일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경리 능내동에서 아버지 이경선(李敬善, 1839년 ~ 1912년), 어머니 김해 김씨(金海金氏, 1833년 ~ 1896년) 사이에 3남 2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으나, 손위의 두 형이 그의 출생 전에 천연두로 사망했기 때문에 장남 역할을 대신하였고 사실상의 6대 독자가 되었다.

아버지 이경선은 양녕대군(조선 태종의 장남)의 다섯째 서자 장평도정(長平都正) 이흔(李訢)의 15대손으로, 왕족이었지만 계승권에서 밀려나 가난하게 자랐기 때문에 조선왕조 자체에 대해 극히 비판적이었다 한다. 이승만의 6대조 할아버지 이징하(李徵夏)가 음직(陰職)으로 현령(縣令)을 지낸 것을 끝으로 벼슬길이 끊기고 어렵게 살아갔다. 아버지 이경선은 일찍이 벼슬길을 포기했고 원래 부자였으나 풍수지리에 몰두하여 조상의 묘자리를 새로 찾아 이장함으로써 가문의 재흥을 꾀한다는 생각에 남은 재산을 거의 탕진하고 방랑으로 집에서 일없이 지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부모는 어렵게 얻은 아들에 대한 공부열이 대단하였다. 1879년 퇴직 대신 이건하가 운영하는 낙동서당에 입학하였고, 1885년부터 1894년 이전까지 사간원 대사간을 지낸 양녕대군의 봉사손 이근수가 운영하는 도동서당에 다니면서 수학하였다. 도동서당은 한성부 용산에 있었다. 1887년 13세 때에 아명인 승룡에서 승만(承晩)으로 이름을 고쳤다.

1895년 4월 2일에는 아펜젤러의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 이듬해 8월 배재학당의 영어교사가 되었다. 같은해 10월 일제가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자, 국모살해한 원수를 갚고 국왕을 구출하여 친일적인 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시위운동을 벌이다가 지명수배를 당하였다. 1896년 서재필(徐載弼)이 미국에서 돌아와 협성회(協成會), 독립협회 등을 조직하자, 이에 가담하여 개화,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서재필이 미국으로 추방당한 뒤 '협성회보'와 '매일신문'의 주필로 활약하고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는 등 독립사상 고취와 민중계몽에 앞장섰다. 또한, 부패, 무능한 정부를 비판하고 민주적 자문기관으로 중추원(中樞院)의 설치를 주장하다가 1898년 황국협회의 무고로 투옥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1904년 민영환(閔泳煥)의 주선으로 석방되었다.

이해 겨울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루스벨트(Roosevelt, T. D.) 미국대통령을 만나 한국에서 일본의 침략을 퇴치하는 데 협조하여줄 것을 호소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미국에 머물면서 수학하기로 결심하고 조지워싱턴대학에 입학하여 1907년 졸업하였다. 1908년 하버드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1910년에는 프린스턴대학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으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같은해 8월 한국이 일제에 강점당하자, 9월에 귀국하여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YMCA)를 중심으로 후진들을 지도하였다. 1912년 일제가 조작한 이른바 '105인사건'에 연루되었으나 미국선교사들의 주선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1912년 미국에서 열린 세계감리교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하기 위하여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1913년 하와이로 건너가 한인학원(韓人學院)을 운영하고, 1914년 '한국태평양'을 창간하였다. 또, 주간잡지 '태평양'을 창간하여 1939년까지 사설을 썼다. 그러나 하와이한인사회에서 한인학교, 교회 등의 경영권 논란과 공금유용문제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또한, 열강과의 외교를 통하여 독립을 달성해야 한다는 외교론을 주장하여 교포사회의 대립과 분열을 초래하였다.

한성정부, 노령정부, 상해임시정부 등 3.1운동 이후 국내외에 설립된 모든 정부조직에 대통령, 수상, 총리 등으로 추대되었다. 1919년 4월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어 초대국무총리로 추대되었으나 대통령제를 주장하고 자신이 스스로 대통령이라는 직함을 사용하여 임시정부내에 논란이 되었다. 그러나 결국 임시정부의 직제를 대통령제로 고치게 되었고, 워싱턴에 구미위원부의 책임을 맡아 외교활동에 주력하였으나 미국 관리들의 비협조적인 태도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반대에 봉착하였다.

1920년 12월 상해로 건너가 대통령에 취임하였으나, 워싱턴군축회의에 대비하기 위하여 1921년 5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상해로 돌아오지 않고 미국에 머물러 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서의 직능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여 임시정부의 활동에 제약을 주었고, 위임통치안 제출설 등으로 임시정부내에서 계속 논란이 되다가 1922년 6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議政院)은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불신임안을 결의하고, 1925년 3월에는 탄핵안을 상정, 통과시켰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임시정부의 모든 결정을 무시하고 구미위원부를 통하여 독립을 위한 활동을 독단으로 계속하였다. 1933년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회의에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으며, 워싱턴, 하와이 등지에서 항일투쟁과 외교활동을 계속하였다.

1945년 광복을 맞아 이해 10월에 귀국, 민주진영의 지도자로 독립촉성중앙위원회 총재,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의장, 민족통일총본부 총재 등을 역임하면서 좌우합작반대, 미소공동위원회 참가거부, 김구(金九)의 남북협상거부 등의 정치적 반탁, 반공 및 단독정부의 즉각적인 수립을 주장하여 단독정부 수립 노선을 지속적으로 견지하였고, 미군정의 용공정책에 반대하였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무투표당선되어 초대국회의장에 선출되고, 내각책임제 헌법초안에 강력히 반대하여 대통령제로 헌법이 제정되도록 하여 그해 7월 초대대통령에 당선되어 대한민국정부 수립과 함께 취임하였다.

그뒤 강력한 반공, 배일주의자로서 국내의 공산주의운동을 분쇄하고 일본에 대해서는 강경외교를 견지하였다. 6.25 때에는 유엔군의 도움을 얻어 공산군을 격퇴하였고, 동란중 국토가 분단된 상태에서의 휴전협상에 강력히 반대하였으며, 1953년 6월 남한 각지에 수용되어 있던 반공 애국포로 2만7000여명을 유엔군의 양해 없이 단독으로 석방하였다. 같은해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자, 한미양국은 휴전 후에도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하고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다는 조건으로 이를 수락하였다.

6.25로 정부가 부산에 피란해 있던 1951년 12월 자유당을 창설하였으며, 다음해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게 되어 있는 헌법을 대통령직선제로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4년임기의 대통령직에 재선되었다. 1954년 국회는 이승만에게 대통령 3선금지를 면제해주는 사사오입(四捨五入)개헌을 통과시켰다. 1956년의 선거에서 민주당 대통령후보 신익희(申翼熙)가 투표 며칠 전에 사망하여 투표권자 56%의 지지를 얻어 세번째 당선되었다.

1960년 3.15 정,부통령선거에서는 민주당 대통령후보 조병옥(趙炳玉)이 선거 전에 사망하여 4선이 확실해졌으나 자유당의 부통령후보 이기붕(李起鵬)을 당선시키기 위하여 대대적인 부정이 감행되었다. 이와같이 장기집권을 위하여 여러 차례 불법적인 개헌을 하고, 정적과 야당을 강압함으로써 정치발전에 지장을 주었으며, 대외적으로는 융통성 없는 강경책으로 일관하였다. 결국 3.15부정선거와 자유당 독재로 4.19를 초래하여 4월 26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으며,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梨花莊)에 잠시 머물다 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1965년 7월 19일 하와이 호놀룰루 요양원에서 사망하였다. 같은 해 7월 27일 가족장으로 영결식이 있었고, 유해는 하와이에서 국내로 옮겨와 가족장으로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저서로는 '독립정신', '일본내막기'(영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