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에 활동하였던 유교개혁사상가, 공교운동(孔敎運動)의 지도자, 금문경학자(今文經學者). 호는 진암(眞菴) 또는 백운산인(白雲山人). 경상남도 함양 출생. 청년기에 곽종석(郭鍾錫)의 문하에 들어가 한주학파(寒洲學派)인물들과 교유하면서 성리학을 수학하였다. 1903년 34세 때 서울에 올라와 시국의 변화에 접하면서, 강유위(康有爲)의 변법설(變法說)과 세계정세에 관한 서적을 읽고 개화사상으로 전환하였다. 1914년 45세 때 중국에 건너가서 강유위를 처음 만난 뒤로 1925년 56세 때 다섯번째 방문하는 12년 동안은 강유위의 지도와 영향 아래 공교사상가로서, 유교의 종교개혁운동으로서 공교운동을 전개하였다. 1926년 이후로는 공교사상의 경학적 기초를 정비하는 데 진력하였다. 그는 강유위를 이어 금문경학연구에 전력함으로써 우리나라에서는 금문경학 내지 공양학(公羊學)의 독보적 인물로 위치를 확보하였다. 그의 공교사상은 1914년 북경에서 쓴 '종교철학합일론 宗敎哲學合一論'에서 싹트기 시작한 것을 보여준다. 곧 서양에서는 철학과 종교가 진지(眞知)와 미신으로 구별되지만, 동양의 종교인 유교는 미신을 벗어남으로써 철학과 종교를 합일시킨다고 파악한다. 또한, 그의 공교운동은 강한 민족의식과 결합됨으로써 유교사상과 자주적인 민족사를 결합시켜 '역사교리착종담 歷史敎理錯綜談'(1921)과 '오족당봉유교론 吾族當奉儒敎論'(1921)을 저술한다. 유교개혁론으로서 그의 공교사상은 '유교복원론 儒敎復原論'(1919)에서 체계화되는 것을 본다. 그는 '공경대의고 孔經大義考'(1924)를 시작으로 하여 '시경부주삼가설고 詩經附注三家說考'(1926), '서경전주금문설고 書經傳注今文說考'(1926), '예경금문설고'(1927), '역경금문설고'(1928) 등 금문경학의 체계적 주석을 업적으로 남겨주었다. 그는 공교가 보편성과 현실성 및 진보성의 현대적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강조하고, 전통의 향교식유교(鄕校式儒敎)가 아니라 교회식유교(敎會式儒敎)의 건설을 주장하였다. 여기서는 교당을 지어 공자를 섬기고 성경을 번역하여 천하에 배포하며, 교사(敎士)를 선정하여 천하에 경전을 강설하게 한다는 등 구체적인 포교방법까지도 제시하고 있다. 그 실천으로서 산청군 단성면 배양마을에 배산서당(培山書堂)을 지어 최초의 민립문묘(民立文廟)를 세웠다. 중국 취푸(曲阜)의 공교회로부터 승인을 받은 한국공교회지부를 설치하고 공교운동의 기지로 삼고자 하였다. 그의 정열적인 공교운동은 당시 조선 사회의 보수적인 유림들로부터 강경한 항의에 부딪혀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따라 그는 금문경학의 연구와 저술에 만년의 생애를 바쳤다. 그는 국가적 권위로부터 독립된 유교의 종교적 교단을 수립하고 조직화하기를 추구하였던 유교개혁사상가로서 한국유교사에 독특한 자취를 남기고 있다. 또한, 이 시기에 강유위의 금문학을 우리나라에서 계승한 그의 업적은 한국경학사에서 새로운 경학영역을 열어준다는 중대한 의미에서 평가될 수 있다. 그의 문집은 중국과 국내에서 부분적으로 인쇄, 간행되기도 하였으나 대부분이 친필 유고본으로 남아 있다. 아세아문화사에서 '진암전서' 라는 표제로 1989년 영인, 간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