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윤희순(尹熙順)
  • 해주윤씨(海州尹氏),  출생~사망 : 1860 ~ 1935
여성독립운동가. 서울 출신. 윤익상(尹翼商)의 딸이다.

16세 때 고흥유씨(高興柳氏) 제원(濟遠)에게 출가하여 유홍석(柳弘錫)의 며느리, 유중교(柳重敎)의 증손부가 되었다. 1895년 민비시해사건과 단발령이 강행되자 시아버지인 유홍석이 유중악(柳重岳), 유중락(柳重洛) 등의 춘천유림과 더불어 이소응(李昭應)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춘천과 가평 일대에서 의병작전을 전개할 때, 윤희순은 '안사람의 의병가', '병정의 노래' 등 수십수의 의병가를 지어 의병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직접, 간접으로 춘천 의병활동을 적극 후원하였다. 이때 춘천 의병이 무기의 열세로 적의 공격에 못이겨 유홍석이 재종제인 유인석(柳麟錫)의 제천의병(호좌의진)에 가담하여 의병항쟁을 벌이고, 또 유인석과 함께 요동에 들어갔다가 귀국하는 동안에 다른 지방에서 온 의병에게 마을 부녀자와 협력하여 밥을 지어주고, 빨래를 하여주는 등 의병의 뒷바라지에 힘썼다. 그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고 이어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을 구실로 고종 황제를 퇴위하게 하였으며, 한국군대마저 해산시키자 각지에 흩어진 해산군에 의하여 정미의병이 봉기하였다. 이에 같은해 8월 유홍석은 족숙인 유중악 등과 모의하고 가정리(柯亭里)항골〔恒谷〕에서 유영석(柳寧錫), 유봉석(柳鳳錫), 박화지(朴華芝) 등과 더불어 의병 600명으로 가평 주길리(珠吉里) 등지에서 치열한 혈전을 벌였다. 이때 의병자금과 탄약, 군량이 부족하게 되자 윤희순은 향민으로부터 군자금을 모금하여 여의내골〔餘義川谷〕 주산(周山)에서 놋쇠와 구리를 구입하고 무기와 탄환을 제조, 공급하는 한편, 의병가를 지어 부르게 하여 의병훈련을 진작시켰다. 유홍석이 주길리전투에서 부상당한 뒤 제천 장담리(長潭里) 유중교의 집에 머무르고 치료하면서 의병재조직을 계획하던 중 1910년 8월 국치를 당하게 되었다. 유홍석이 왜적의 통치를 받을 수 없다 하여 먼저 만주로 이주하였으므로 1911년 윤희순 가족 역시 유홍석을 뒤따라 만주로 들어가서 의병재거를 도모하게 되었다. 그러나 1913년 12월 유홍석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고, 1915년 1월 이미 망명하여온 유인석이 죽었으며, 남편인 유제원 또한 독립운동을 꾀하다가 같은해 10월 회인현(懷仁縣)에서 죽었다. 이에 윤희순은 대한독립단에 가입하여 투쟁하고 있는 돈상(敦相), 민상(敏相) 두 아들을 포함한 자손들에게 희망을 걸고 국권회복을 염원하면서 살아오다가, 맏아들인 돈상이 그의 처남 음성국(陰聖國)과 함께 일본경찰에게 잡혀 고문 끝에 1935년 7월 19일 순국함으로써, 3대에 걸쳐 의병활동의 뒷바라지를 하여오던 그는 10여일 뒤인 8월 1일 자손에게 훈계하는 글과 일생기록을 남기고 향년 76세로 만주 땅에서 일생을 마쳤다. 그의 시신은 만주 해성현 묘관둔(海城縣苗官屯)북산에 장사지내어 아직 고향으로 반장(返葬)되지 못하고 있다. 이와같은 윤희순의 간절한 애국정신과 일생에 걸친 의병활동의 뒷바라지를 추앙하여 1982년 11월 9일 강원대학교에서 '해주윤씨의적비 海州尹氏義蹟碑'를 항골마을에 건립하였고, 정부에서는 1983년 8월 3일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