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지사. 자는 동옥(東玉). 호는 심석(心石). 충청남도 회덕 출신.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이며, 참의 달수(達洙)와 근수(近洙)의 종질이며,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순절한 병선(秉璿)의 아우이다. 종형인 병선과 함께 큰아버지인 달수의 문하에서 성리학과 예학을 수학하였으며, 달수의 사후에는 근수와 외할아버지의 지도를 받았다. 1888년(고종 25) 묘당의 천거로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1903년 학행이 뛰어나고 중망(衆望)을 지니고 있음을 듣고 고종이 홍문관서연관(弘文館書筵官)에 임명하였으나 친일파의 방해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뒤 영동군 학산면에 강당을 세우고 많은 문인들을 지도, 계발하여 천리를 밝히며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정력을 기울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송병선이 이의 파기를 위하여 활동하다가 순국하였음을 듣고, 옳은 길을 지켜 죽을 때라 하고 '은산철벽에 불타 버리지 않는 것은 오직 옥(玉)이다. ' 하며 구국활동을 결심하였다. 그해 11월에 '토오적문 討五賊文'을 지어 전국유림에게 선포하여 민족정기의 앙양과 국권회복을 호소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여 '나라를 위하는 충성과 겨레를 사랑하는 마음에는 순국하는 길밖에 없다. ' 하고 그해 9월 5일 강당 뒤 서산의 높은 봉우리에 올라 투신자결하고자 할 때 문인 김용호(金龍浩)가 뒤에서 껴안아 미수에 그치자 그뒤 두문불출하고 망국의 슬픔을 시로써 달래었다. 이때 영동군 양산의 일본 헌병대가 은사금을 가져오자 이를 질책하여 거절하였다. 1912년 일제가 회유책으로 경학원(經學院)강사에 임명하자 이를 거절하고, 대의를 지켜 순국할 것을 결심, 유서를 남기고 음독자결하였다. 1968년에 대통령표창, 1977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저서로는 15권의 문집과 '학문삼요 學問三要', '사례축식 四禮祝式', '용학보의 庸學補疑' 등이 있다. 1914년 병선의 사당인 영동의 문충사(文忠祠)에 병향되었으며, 1970년 문충사는 대전광역시 용운동으로 이전되었는데, 일명 용동서원(龍洞書院)이라고도 한다. 1973년에 대전역 앞에 동상이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