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항일기의 대종교 중진. 자는 경화(景化). 호는 호정(湖亭). 함경북도 경원 출생. 16세 때 노령(露領) 연추지(延湫地)로 이주하여 개간활동을 하였다. 1906년 이상설(李相卨)이 간도 용정촌(龍井村)에 서전의숙(瑞甸義塾)을 세우자 숙감(塾監)으로 시무하였고, 다음해 연추지에 노령 최초의 한인학교인 선흥의숙(鮮興義塾)을 세워 청년들을 교육하였다. 1912년 대종교를 신봉하여 북만(北滿)의 시교원(施敎員)을 자청하고 길림성 의란도 밀산(吉林省依蘭道密山)으로 이주하여 시교당(施敎堂)과 한흥의숙(韓興義塾)을 세웠는데, 북만일대의 한인교당과 학교로서는 이것이 또한 처음이었다. 1921년 상교(尙敎)로 승진하였고, 동일도본사(東一道本司) 전리(典理)를 대행하였다. 1922년 청구(靑溝) 이북, 연해주 이서의 교무를 맡아서 활동하던 중 비적들의 습격을 받아 가족과 함께 참사를 당하였다. 뒤에 생전의 공적이 인정되어 정교(正敎)로 추승됨과 동시에 대형호(大兄號)가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