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이두황(李斗璜)
  • 인천이씨(仁川李氏),  출생~사망 : 1858 ~ 1916
민족반역자. 자는 공칠(公七), 설악(雪嶽). 명흡(命洽)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조씨(趙氏)이다. 서울의 상인(常人) 출신으로 가난하였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 후 무과에 급제, 친군좌영초관(親軍左營哨官)을 시작으로 수문장 등의 무관직을 거쳐 1889년 흥해군수를 지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장위영영관(壯衛營領官)으로서 초토영중군(剿討營中軍), 죽산부사 겸 양호도순무영우선봉(竹山府使兼兩湖都巡撫營右先鋒)으로 승진을 하면서 동학군과 많은 전투를 하였다. 특히, 동학의 북접(北接)들이 제2차 봉기에 참가하여 보은 장내에 모였을 때 이들을 기습하였고, 김개남(金開南)의 동학군을 목천 세성산에서 격파함으로써 공주로 북상하던 전봉준(全琫準)의 동학군과 이들의 합세를 불가능하게 하였다. 다시 패퇴하는 동학군을 추격하여 해미, 유구(維鳩), 노성(魯城), 논산 등지에서 많은 동학군을 살륙하였고, 전주에 재집결한 동학군을 대패시키고 전주를 탈환하였다. 그뒤 장위영참령관으로서 평양에 있던 청군을 공격하려는 일본군에 파견되어 정찰수행과 정보제공을 하였고, 평양백성을 부역시켜 청군의 시체를 처리하기도 하였다. 1895년 훈련대 제2대 대장으로 민비시해에 가담하여 광화문경비를 담당하였다. 체포령이 내려지자, 아들 진백(鎭白)과 함께 부산으로 도주하여 일본인들의 도움을 받아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망명생활 10여년 동안 특별히 하는 일은 없었으며, 1907년 특사가 되어 귀국하였다. 친일파를 부식하려는 이토(伊藤博文)의 배려로 중추원부찬의(中樞院副贊議)가 되었고, 곧 의병투쟁이 치열하던 전라북도의 관찰사 겸 재판소판사로 임명받았다. 1910년 이후에도 전라북도장관으로 죽을 때까지 재임하였고, 그밖에 제국재향후원회 조선지회 전라북도부회장(帝國在鄕後援會朝鮮支會全羅北道部會長) 등 일본 사회단체의 지부장도 겸임하였다. 그동안 여러 차례에 걸친 서위(敍位)와 거액의 상여금을 일제로부터 받았다. 유길준(兪吉濬)과 친밀한 관계를 가졌고, 특히 일본인들과 교유가 많았다. 또한, 일본불교를 독실하게 믿어 자기의 장례도 화장으로 치르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