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호는 위석(渭石). 복원(復元), 승원(承園), 양원(陽園) 등의 가명을 쓰기도 하였다. 황해도 봉산 출신. 경성사립오성학교(京城私立五星學校)를 졸업하고 보성전문학교 상과에 재학중에 3, 1운동에 참가하고, 대일무력항쟁을 계획하려다 비밀이 누설되어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1922년 나석주(羅錫疇), 이성(李成, 일명 景材), 송호(宋虎, 일명 虎聲), 김기덕(金基德) 등과 함께 중국 한단육군군관강습소(邯鄲陸軍軍官講習所)에 입소하여 군사학을 수학하였고, 이어 1923년에는 바오딩육군공병단훈련소(保定陸軍工兵團訓鍊所)에 입소하여 공병군사학을 전공하였다. 이에 앞서 1921년 상해임시정부의 정원의원이 되었으며, 1924년에는 통의부(統義府) 군사부의 의용군사과장 겸 지도부장에 임명되어 봉천성 흥경현 왕청문 이도구(奉天省興京縣旺淸門二道溝)에서 군사훈련에 헌신하였다. 같은 해에 통의부지휘부가 있는 흥경현 북전자(北甸子)를 기습한 일본군과 싸우다가 부상하였다. 1925년 정의부(正義府) 중앙심판원 겸 생계부(生計部) 이재과장(理財課長), 1927년 백산학교(白山學校) 교원, 1928년 동광학교(東光學校) 교원, 1929년 신민부(新民府) 중앙위원, 1930년 대한농민당 중앙위원, 1931년 대한독립군 참모장, 1932년 신한농민당 위원, 1933년 대한혁명당(大韓革命黨) 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같은해 5월에는 중국구국군총사령(中國救國軍總司令)인 이두(李杜) 등과 연합하여 횡도하자(橫道河子), 석도하자(石道河子), 해랑강(海浪江) 등지에서 일본군을 대파하였다. 1939년 구국동지회 회장, 1945년 광한단(光韓團) 부단장 등을 역임하였다. 광복 후 귀국하여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중앙감찰위원, 반민특위조사관(反民特委調○官)을 역임하고 육군보병학교를 거쳐 육군대위를 지냈다. 1963년에 건국훈장국민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