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호는 송죽(松竹). 전라남도 나주 출신. 1924년 3월 인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세이조중학교(成城中學校)를 마치고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에 입학하였다. 당시 일본 에서는 무정부주의운동이 활발하였는데, 동경에 있는 계림장(鷄林莊)이 그 본거지로, 박렬(朴烈), 송영운(宋映運), 최학주(崔學柱), 유치진(柳致眞) 등과 더불어 사귀면서 무정부주의사상에 심취하였다. 1932년 상해로 망명하여 한국혁명당에 가입하는 한편, 안재환(安載煥), 최경수(崔景洙) 등과 함께 철혈단(鐵血團)을 조직, 일제와의 투쟁에 진력하였다. 그뒤 독립군에 투신할 계획으로 황푸군관학교(黃○軍官學校)에 들어가 1936년에 제8기로 졸업하고, 그해 9월부터는 난징(南京) 중국헌병학교 및 군관학교에서 교수직을 역임하면서 임시정부 인사와 교유하였다. 1937년 일본경찰에 붙잡혀 본국으로 압송되는 도중, 칭다오(靑島)에서 탈출하여 본대로 돌아왔다. 1939년 임시정부의 지령으로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를 결성하고 그 대장에 취임하였다. 김동수(金東洙), 박기성(朴基成), 이하유(李何有), 한유한(韓悠韓) 등 간부를 비롯하여 약 30여명으로 출발한 공작대는 같은해 12월 산시성(陜西省) 시안(西安)을 근거지로 퉁관(潼關)을 경유, 뤄양(洛陽), 초작(○炸), 윈청(運城), 린펀(臨汾), 타이위안(太原), 스쟈좡(石家莊), 베이핑(北坪) 등지를 연결하는 일선공작에 주력하여, 산시, 허난(河南), 화북(華北) 3성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공작대의 시안 이주 후 각 파견대가 적 깊숙이 침투하여 초모한 병력이 100여명을 넘었는데, 본대에서 이들 신입 청년을 훈련하여, 장래 독립전쟁에서 앞장 설 투사로 육성하였다. 이동안 충칭(重慶)에서 임시정부에 광복군총사령부가 설립되고, 뒤이어 사령부가 시안에 설치됨에 따라, 1941년 3월이 청년전지공작대는 그대로 광복군 제5지대로 편성되었다. 제5지대 지대장 겸 징모 제5분처 주임위원으로 새롭게 임명되어, 적 점령지역에 대한 초모, 선전, 첩보,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한편 중국측 사령 호종남(胡宗南)의 협조를 얻어 시안에 있는 중앙전시간부훈련단 제4단내에 한국청년간부훈련반을 특설하여, 제1차적으로 김천성(金天成), 김해성(金海星), 김세용(金世用), 백정현(白正鉉), 이해순(李海淳), 김용주(金容珠) 등 50여명의 청년들을 입교시켜 교육하였다. 그뒤 제5지대 대원들을 각지로 파견하여 공작을 시키는 한편, 자신은 한국청년간부훈련반에 대한 교육감독 및 지원 등에 심혈을 기울이며 활약하던 중, 박동운(朴東雲) 등 변절자에 의해 피살되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