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호는 계원(桂園). 황해도 송화(松禾)군 풍해면 성하리에서 1875년 1월 10일 시골 선비 노병균(盧秉均)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때부터 남달리 신장이 크고 얼굴도 컸으며 마음이 침착하고 성격이 매우 호탕하였다. 부친은 장차 무인이 되기를 희망하고 병사를 잘 다스릴 수 있는 지장(智將)이 되기를 바라고 아들의 한문수학 뒷바라지를 아끼지 않았다.
1895년 일본 유학생의 일원으로 추천을 받아 이갑(李甲), 유동열(柳東說) 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서 보통과와 특별과를 수학하였다. 1898년 세이조학교(成城學校)를 졸업하였으며, 이듬해 11월에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1900년 10월에 귀국하자 당시 원수부회계국총장(元帥府會計局總長) 민영환(閔泳煥)의 적극적인 주선으로 윤치성(尹致晟), 김형섭(金亨燮), 어담(魚潭) 등과 같이 육군 참위에 임관되고, 한국무관학교 보병과 교관에 임명되어 후진양성에 진력하였다. 1904년의 러일전쟁 때 관전사(觀戰使)가 되어 일본군 위문사인 군부대신 권중현(權重顯)을 따라 만주의 대련(大連), 여순(旅順) 등지를 두루 시찰하고 귀국한 뒤, 정위, 참령, 부령, 정령으로 승진하여 육군무관학교교장, 헌병대장, 육군연성학교교장 등 육군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907년 8월 한국군이 강제 해산당하고 육군연성학교도 폐교되자 군부 교육국장 직으로 옮겼다. 그뒤 경술국권피탈 때 낙향하여 신민회운동(新民會運動)에 관여하기도 하고, 김구(金九)와 함께 해서교육총회장(海西敎育總會長)으로 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수안금광에 손을 대고 서울에서 피혁상도 경영하였으나, 10여만원의 손해만 내고 가산을 탕진하였다. 1914년 미국 캘리포니아로 망명하여, 재미동포인 김종림(金鍾林)의 지원을 얻어 항공학교를 설립하고 공군용사를 육성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919년 3, 1운동이 일어나자 상해(上海)에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무총장의 중책을 맡았고, 뒤에는 국무총리에 취임하였다. 1925년 4월 국무총리직을 사임하고 그해 5월 참모총장이 되어 독립군 육성에 헌신하였다. 그뒤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 워싱턴의 구미위원부에서 외교위원으로 소련에 파견되어 외교활동을 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어릴때부터 남달리 신장이 크고 얼굴도 컸으며 마음이 침착하고 성격이 매우 호탕하였다. 부친은 장차 무인이 되기를 희망하고 병사를 잘 다스릴 수 있는 지장(智將)이 되기를 바라고 아들의 한문수학 뒷바라지를 아끼지 않았다.
1895년 일본 유학생의 일원으로 추천을 받아 이갑(李甲), 유동열(柳東說) 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서 보통과와 특별과를 수학하였다. 1898년 세이조학교(成城學校)를 졸업하였으며, 이듬해 11월에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1900년 10월에 귀국하자 당시 원수부회계국총장(元帥府會計局總長) 민영환(閔泳煥)의 적극적인 주선으로 윤치성(尹致晟), 김형섭(金亨燮), 어담(魚潭) 등과 같이 육군 참위에 임관되고, 한국무관학교 보병과 교관에 임명되어 후진양성에 진력하였다. 1904년의 러일전쟁 때 관전사(觀戰使)가 되어 일본군 위문사인 군부대신 권중현(權重顯)을 따라 만주의 대련(大連), 여순(旅順) 등지를 두루 시찰하고 귀국한 뒤, 정위, 참령, 부령, 정령으로 승진하여 육군무관학교교장, 헌병대장, 육군연성학교교장 등 육군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907년 8월 한국군이 강제 해산당하고 육군연성학교도 폐교되자 군부 교육국장 직으로 옮겼다. 그뒤 경술국권피탈 때 낙향하여 신민회운동(新民會運動)에 관여하기도 하고, 김구(金九)와 함께 해서교육총회장(海西敎育總會長)으로 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수안금광에 손을 대고 서울에서 피혁상도 경영하였으나, 10여만원의 손해만 내고 가산을 탕진하였다. 1914년 미국 캘리포니아로 망명하여, 재미동포인 김종림(金鍾林)의 지원을 얻어 항공학교를 설립하고 공군용사를 육성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919년 3, 1운동이 일어나자 상해(上海)에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무총장의 중책을 맡았고, 뒤에는 국무총리에 취임하였다. 1925년 4월 국무총리직을 사임하고 그해 5월 참모총장이 되어 독립군 육성에 헌신하였다. 그뒤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 워싱턴의 구미위원부에서 외교위원으로 소련에 파견되어 외교활동을 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