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말기의 고승(高僧). 희양산문(曦陽山門)의 개산조(開山祖). 경주김씨. 호는 도헌(道憲). 아버지는 찬양(贊壤)이며, 어머니는 윤씨(尹氏)이다. 승견불(勝見佛) 때의 승려였던 자가 자주 분노하여 용이 되었는데, 이제 사람으로 태어나고자 하니 받아줄 것을 간청하는 태몽을 꾸고 400일 만인 사월초파일에 낳았다. 태어나자 며칠 동안 젖을 먹지 않고 울기만 하였는데, 도인이 찾아와 어머니가 육식과 파, 마늘 등을 금할 것을 깨우쳤다. 그대로 하였더니 젖을 먹기 시작하였다. 9세에 출가하려 하였으나 어머니가 허락하지 않으므로 몰래 부석사(浮石寺)로 가서 범휴대덕(梵休大德)의 제자가 되었다. 어느날 어머니의 병보를 듣고 집으로 돌아가자 어머니의 병은 저절로 나았으나 그가 중병에 걸려 백약이 무효하였다. 어머니가 부처에게 자식의 병을 낫게 하여주면 곧 출가를 시키겠다고 맹세하자 병이 나았다. 그뒤 정식으로 계를 받고 출가하였는데, 이때 맑은 구슬 한개를 얻었다고 한다. 840년(문성왕 2) 경의율사(瓊儀律師) 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계람산(鷄藍山) 수석사(水石寺)에서 고행정진하여 혜은(惠隱)의 선법(禪法)을 이어받았다. 경문왕이 사신을 보내어 청하였으나 응하지 않았고, 864년(경문왕 4) 현계산(賢溪山) 안락사(安樂寺) 주지로 있다가 심충(沈忠)의 청으로 희양산에 가서 절을 창건하고 머물렀다. 881년(헌강왕 7) 왕은 사신을 보내 주위의 땅을 사찰 소유로 정하고 사찰명을 봉암사(鳳巖寺)라 하였다. 그리고 산에서 나오게 하여 선원사(禪院寺)에 머물게 한 뒤 월지궁(月池宮)으로 초빙하여 심요(心要)를 물었다. 그뒤 다시 봉암사로 돌아와서 59세로 입적(入寂)하였다. 시호는 지증(智證), 탑호는 적조(寂照)이다. 현재 봉암사에 남아 있는 적조탑은 보물 제137호, 최치원이 지은 적조탑비는 보물 제138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의 법맥은 사조(四祖) ― 법랑(法朗) ― 신행(信行) ― 준범(遵範) ― 혜은 ― 지증으로 이어지며, 제자로는 양부(楊孚), 성견(性○), 계휘(繼徽)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