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황에스터(黃Esther) 황애덕(黃愛德)
  • 제안황씨(齊安黃氏),  출생~사망 : 1892 ~ 1971
독립운동가. 여성운동가. 일명 황에스터(黃Esther), 황애시덕(黃愛施德).

평안남도 평양 태생이며 유학자인 아버지 황석청(黃錫淸)의 딸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13세 때 평양 정진여학교(正進女學校) 3학년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곧 이화학당(梨花學堂)에 입학하여 1910년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곧장 평양의 숭의여학교(崇義女學校)교사로 부임하여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하였다. 1913년 동료교사 김경희(金敬喜)와 교회 친구 안정석(安貞錫)과 더불어 비밀결사대인 송죽회(松竹會)를 조직하고, 애국사상이 깊은 학생들을 엄선하여 정신교육을 행하고 송죽회의 자회(子會)설립을 지도하면서 동시에 군자금을 마련하여 중국의 항일독립단체에 송금하였다. 1918년 선교사 홀(Hall, R. S.)의 권유로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유학중 김마리아, 현덕신(玄德信), 송복신(宋福信), 정자영(鄭子暎) 등과 동경여자유학생회를 조직하여 유학생간의 친목과 더불어 배일사상 고취와 애국심 고양에 노력하였다. 1919년 2월 6일의 동경유학생회에서 남녀는 두개의 수레바퀴와 같은 것이므로 독립운동에 여성도 참여하여야 할 의무가 있음을 열변하였으며, 2, 8독립선언에 참여하였다. 주동학생으로 경찰에 잡혔다가 곧 풀려나자,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여성대표를 파견할 임무를 띠고 몰래 입국하여 활약하였다. 여성대표로는 신마실라(申麻實羅)가 선정되었는데, 그의 여비 마련을 위하여 노파, 일본 여인 등으로 변장하여 지방 연고지를 찾아 모금을 하였다.

3.1운동이 전국으로 확대되어가는 3월 19일 일본 경찰에 잡혀 그해 8월까지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여성계의 독립운동이 부진함을 개탄하던 김마리아와 더불어 애국부인회를 확대 재조직하고 총무직을 담당하였다. 상해 임시정부에로의 군자금 송달 등의 활약을 하는 애국부인회의 실상이 일본 경찰에 탐지되어 애국부인회 임원이 일제히 검거될 때 검거되어 대구경찰서로 넘어갔다. 재판 결과 3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생활을 하면서 동포 죄수들을 선도 계몽하였다. 형기 1년을 남기고 가출옥한 뒤, 이화학당 대학부 3학년에 편입하였고, 졸업 후 모교의 사감 겸 교사로 봉직하였다. 1925년 미국으로 유학하여 콜롬비아대학에서 교육학석사를 받고, 1928년 귀국한 뒤 농촌계몽운동에 종사하였다. 1930년 혼인 후 남편과 하얼빈으로 가서 일본 인 농장에서 고생하는 교포들에게 애국적인 계몽을 하였다. 광복 후 여성단체협의회를 조직하여 여성문제 타결에 노력하였으며, 6, 25중에는 마침 미국에 있었으므로 미국의 12개주를 순방하면서 구호품을 수합하여 조국으로 보냈다. 1952년에 귀국하여 한미기술학교를 설립한 뒤 전쟁미망인과 고아에 대한 기술교육을 하였다. 1960년 3월 1일 중앙여자고등학교 주최 3, 1운동선도자 제1회 찬하회에서 찬하자가 되었다. 1967년 3.1여성동지회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에서 활약한 여성동지를 규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