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일명 소래(笑來). 호는 불폐(不吠), 연산(蓮山), 도호(道號)는 마루진, 원백(元伯). 함경남도 영흥 출신. 교화(敎和)의 아들이다. 1908년 고향에 연명학교(鍊明學校)를 세워 청소년에게 개화사상을 고취시켰다. 1909년 천도교에 입교하였으며, 보다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목적으로 원종(元宗)을 개창하였다. 1911년 천도교에서 출교당하였고, 1913년 만주에 건원학교(建元學校)를 세웠다. 1916년 안도현에 도전학원(道田學院), 북구학원을 세웠으며, 1917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회령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이듬해 가석방되었다. 그리고 장백현 왕가동에 덕수학원(德水學院), 왕가학원(王歌學院)을 설립하였으며, 1919년 만주에서 독립운동단체 대진단(大震團)을 조직하였다. 1920년 연길현에 자피구학원, 1921년 이도구학원, 국자가 남령(局子街南領)에 팔포강학원(八浦岡學院)을 세웠으며, 1922년에 다시 일본경찰에 붙잡혀 중국체류금지 3년을 언도받은 후 1925년에 다시 만주로 건너갔고, 만종학원(萬宗學院)과 건원학원을 합쳐 농대학원(農大學院)을 만들었다. 그리고 종우회(倧友會), 여성종우회 등을 조직하고, '새바람' 지를 창간하여 항일혁명사상을 고취시켰다. 1927년 또다시 일본경찰에 붙잡혀 징역 5년을 선고받았으나, 가석방된 후 1928년 동만주에 건너가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농촌운동을 전개하였다. 즉, 동만주 각 지방에 농우동맹(○友同盟)을 조직하고, 십가일촌(十家一村)의 이상촌을 건설하여 어복촌(魚腹村) 또는 주의촌(主義村: 사상운동의 마을이라는 뜻)이라 부르면서, 만주 영안현 팔도하자(八道河子)에 정착하였다. 그곳에서 모든 주민을 조직, 교육, 훈련시키고 국내의 신간회와 관계를 맺으면서 각 독립단과 사상단체 등의 규합을 시도하였다. 1927년 어복학원, 하음자학원(下○子學院)을 설립하고, 진우회(震友會), 에이비시단(ABC團)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31년에는 조선혁명지도처를 설치하여 항일투쟁의 총지휘부로 삼고, 중국구국군사령부와도 긴밀히 접촉하면서 연합전선 구축에도 노력하였다. 항일투쟁은 만주대십자정책(滿洲大十字政策), 동방약소민족해방대연맹, 항일백만단체결속운동 등으로 수행되어나갔으나, 1933년 조선공산군 이광(李光)의 부대에 붙잡혀 사살되었다. 유저로 '소래집'이 있으며, 1977년 건국훈장국민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