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전국적인 의병봉기에 자극을 받고 있던 중 이해 9월 일제가 민중의 무장투쟁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총포급화약류단속법(銃砲及火藥類團束法)'을 공포, 포수들의 총을 회수하자, 그해 11월 차도선(車道善), 태양욱(太陽郁)과 산포대(山砲隊)를 조직, 의병을 일으켜 북청의 후치령(厚峙嶺)을 중심으로 갑산(甲山), 삼수(三水), 혜산(惠山), 풍산(豊山) 등지에서 유격전으로 일본 수비대를 격파하였다. 1910년 소수의 부하를 이끌고 간도로 건너가 차도선, 조맹선(趙孟善) 등과 함께 포수단(砲手團)을 조직, 교포에게 광복사상을 고취하며 국내와 연락, 애국지사 소집과 독립군 양성에 진력하였다.
1919년 3, 1운동 후 동만주에 거주하는 동포들이 간도대한국민회(間島大韓國民會)를 결성하자 그 예하의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총사령관에 취임하였다. 같은해 8월, 20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너 혜산진, 갑산 등지의 일본군을 습격, 큰 전과를 거두었다. 이에 자신을 가지고 정예부대를 인솔하여 다시 압록강을 건너 강계(江界) 만포진(滿浦鎭)을 습격한 뒤 자성에서 3일 동안 일본군과 교전하여 70여명을 사살하는 대전과를 거두었다. 이후 최진동(崔振東)이 지휘하는 도독부(都督府)와 통합, 500여명의 대부대로 국내 진입작전을 감행하였다.
1920년 6월 최진동과 협력하여 종성(鍾城) 삼둔자(三屯子)부근에서 국경수비대와 격전을 벌여 120명을 사살하는 대전과를 올렸으며, 두만강 대안의 봉오동(鳳梧洞)에서 일본군 대부대를 전멸시켜 대전적을 올렸으니 이것이 유명한 봉오동전투이다. 또한 같은해 10월 청산리전투에서도 제1연대장으로 참가, 제2연대장 김좌진(金佐鎭), 제3연대장 최진동 등과 함께 일본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거듭한 일본군이 계속적인 추격을 해옴에 따라 독립군 조직을 총망라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 부총재에 선임되었으며 그뒤 간도지방의 김좌진, 최진동 부대와 함께 노령(露領)으로 이동, 1921년 흑룡강 자유시(自由市)를 새로운 근거지로 삼고 러시아군과 교섭하여 협조를 얻었으나, 러시아 공산당의 배반으로 독립군이 무장해제되고, 사살되거나 포로가 되는 등 이른바 자유시참변을 겪게 되었다.
이 사변 이후 1922년 고려공산당과 한족공산당이 통합되어 조직된 고려중앙정청(高麗中央政廳)의 고등군인징모위원에 임명되었으나 이만, 연해주 등의 집단농장, 협동농장 등에서 농업에 종사하면서 농민층의 생활 향상과 한인동포들의 권익보호에 힘썼다.
1937년 9월 스탈린에 의한 한인 강제 이주정책에 따라 선생은 연해주를 떠나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그러던 중 1943년 10월 25일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75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907년 전국적인 의병봉기에 자극을 받고 있던 중 이해 9월 일제가 민중의 무장투쟁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총포급화약류단속법(銃砲及火藥類團束法)'을 공포, 포수들의 총을 회수하자, 그해 11월 차도선(車道善), 태양욱(太陽郁)과 산포대(山砲隊)를 조직, 의병을 일으켜 북청의 후치령(厚峙嶺)을 중심으로 갑산(甲山), 삼수(三水), 혜산(惠山), 풍산(豊山) 등지에서 유격전으로 일본 수비대를 격파하였다. 1910년 소수의 부하를 이끌고 간도로 건너가 차도선, 조맹선(趙孟善) 등과 함께 포수단(砲手團)을 조직, 교포에게 광복사상을 고취하며 국내와 연락, 애국지사 소집과 독립군 양성에 진력하였다.
1919년 3, 1운동 후 동만주에 거주하는 동포들이 간도대한국민회(間島大韓國民會)를 결성하자 그 예하의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총사령관에 취임하였다. 같은해 8월, 20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너 혜산진, 갑산 등지의 일본군을 습격, 큰 전과를 거두었다. 이에 자신을 가지고 정예부대를 인솔하여 다시 압록강을 건너 강계(江界) 만포진(滿浦鎭)을 습격한 뒤 자성에서 3일 동안 일본군과 교전하여 70여명을 사살하는 대전과를 거두었다. 이후 최진동(崔振東)이 지휘하는 도독부(都督府)와 통합, 500여명의 대부대로 국내 진입작전을 감행하였다.
1920년 6월 최진동과 협력하여 종성(鍾城) 삼둔자(三屯子)부근에서 국경수비대와 격전을 벌여 120명을 사살하는 대전과를 올렸으며, 두만강 대안의 봉오동(鳳梧洞)에서 일본군 대부대를 전멸시켜 대전적을 올렸으니 이것이 유명한 봉오동전투이다. 또한 같은해 10월 청산리전투에서도 제1연대장으로 참가, 제2연대장 김좌진(金佐鎭), 제3연대장 최진동 등과 함께 일본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거듭한 일본군이 계속적인 추격을 해옴에 따라 독립군 조직을 총망라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 부총재에 선임되었으며 그뒤 간도지방의 김좌진, 최진동 부대와 함께 노령(露領)으로 이동, 1921년 흑룡강 자유시(自由市)를 새로운 근거지로 삼고 러시아군과 교섭하여 협조를 얻었으나, 러시아 공산당의 배반으로 독립군이 무장해제되고, 사살되거나 포로가 되는 등 이른바 자유시참변을 겪게 되었다.
이 사변 이후 1922년 고려공산당과 한족공산당이 통합되어 조직된 고려중앙정청(高麗中央政廳)의 고등군인징모위원에 임명되었으나 이만, 연해주 등의 집단농장, 협동농장 등에서 농업에 종사하면서 농민층의 생활 향상과 한인동포들의 권익보호에 힘썼다.
1937년 9월 스탈린에 의한 한인 강제 이주정책에 따라 선생은 연해주를 떠나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그러던 중 1943년 10월 25일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75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