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 때 김영주(金永周)와 결혼하였다. 6년 후인 1895년에 남편이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하자, 3대독자인 유복자를 기르면서 시부모를 모셨다. 1919년 만주로 망명하여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서 활약하는 한편, 독립운동의 각 단체와 군사기관 및 농어촌을 순회하면서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동만주 12곳에 교회와 예배당을 세워 전도하였으며, 10여곳에 여자교육회를 설립하여 여성계몽에 힘썼다. 또한, 남만주 각지를 순회하면서 동포간의 단합과 군자금 모집을 위하여 활약하였다. 1925년에는 채찬(蔡燦), 이청산(李靑山) 등과 총독 사이토(齋藤實)의 암살을 계획하였으나 미수에 그치고 다시 만주로 돌아갔다. 마침 그때 길림주민회장 이규동(李圭東), 의성단장(義成團長) 편강렬(片康烈), 양기탁(梁起鐸), 손일민(孫一民) 등이 주동이 되어 재만독립운동단체의 통일을 발기하자 이에 적극 참가하여 크게 공헌하였다. 1928년 길림(吉林)에서 김동삼(金東三), 안창호(安昌浩) 등 47명이 중국경찰에 검거되었을 때 지성으로 간호하며 석방운동에 온 힘을 기울였다. 1931년 김동삼이 하얼빈에서 붙잡히자 그를 탈출시키려 온갖 노력을 다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1932년 국제연맹 리튼조사단이 하얼빈에 왔을 때 흰 수건에 '한국독립원(韓國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써서 조사단에 보내 우리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1933년 이규동 등과 주만일본대사 부토(武藤信義)를 격살하기로 하고 동지와의 연락 및 무기운반 등의 임무를 띠고 걸인노파의 차림으로 하얼빈 교외 정양가(正陽街)를 지나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6개월 동안이나 갖은 혹형을 받다가 단식투쟁을 전개하고 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 '라는 말을 남기고 하얼빈에서 죽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9세 때 김영주(金永周)와 결혼하였다. 6년 후인 1895년에 남편이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하자, 3대독자인 유복자를 기르면서 시부모를 모셨다. 1919년 만주로 망명하여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서 활약하는 한편, 독립운동의 각 단체와 군사기관 및 농어촌을 순회하면서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동만주 12곳에 교회와 예배당을 세워 전도하였으며, 10여곳에 여자교육회를 설립하여 여성계몽에 힘썼다. 또한, 남만주 각지를 순회하면서 동포간의 단합과 군자금 모집을 위하여 활약하였다. 1925년에는 채찬(蔡燦), 이청산(李靑山) 등과 총독 사이토(齋藤實)의 암살을 계획하였으나 미수에 그치고 다시 만주로 돌아갔다. 마침 그때 길림주민회장 이규동(李圭東), 의성단장(義成團長) 편강렬(片康烈), 양기탁(梁起鐸), 손일민(孫一民) 등이 주동이 되어 재만독립운동단체의 통일을 발기하자 이에 적극 참가하여 크게 공헌하였다. 1928년 길림(吉林)에서 김동삼(金東三), 안창호(安昌浩) 등 47명이 중국경찰에 검거되었을 때 지성으로 간호하며 석방운동에 온 힘을 기울였다. 1931년 김동삼이 하얼빈에서 붙잡히자 그를 탈출시키려 온갖 노력을 다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1932년 국제연맹 리튼조사단이 하얼빈에 왔을 때 흰 수건에 '한국독립원(韓國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써서 조사단에 보내 우리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1933년 이규동 등과 주만일본대사 부토(武藤信義)를 격살하기로 하고 동지와의 연락 및 무기운반 등의 임무를 띠고 걸인노파의 차림으로 하얼빈 교외 정양가(正陽街)를 지나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6개월 동안이나 갖은 혹형을 받다가 단식투쟁을 전개하고 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 '라는 말을 남기고 하얼빈에서 죽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