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정치인. 호는 일파(一波). 서울 출생. 중국 망명 당시에는 일명 예빗, 엄이라고도 불렀다. 승지 엄주완(嚴柱完)의 아들이다.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3, 1운동에 가담하였다가 192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항저우(抗州)에서 지장대학(芝江大學)을 졸업하였다. 상해(上海)로 돌아와서 언론계에서 활동하다가 1929년부터는 청년운동에 참여하여 재중국한인청년동맹 중앙위원이 되었으며, 1931년에는 안창호(安昌浩), 선우 혁(鮮于赫), 차이석(車利錫)과 같이 자활자위를 목적으로 하는 공평사운동(公平社運動)에도 참여하였다.
1932년에는 임시의정원 의원에 취임하여 김구(金九)를 보좌하여 한국독립당 선전부장을 맡았다. 1942년에는 임시의정원 외무분과위원장에 취임하였으며, 1944년에는 임시정부 선전부장에 취임하였다. 1945년 11월 23일 임정요인의 제1진으로 환국하여 경교장(京橋莊)을 중심으로 조완구(趙琬九)와 함께 김구의 유일한 측근으로 김구를 보좌하였으며, 문장에 뛰어나서 김구 명의로 발표하는 모든 성명이나 국민에게 발표하는 호소문을 거의 기초하였다.
환국하여 계속 한국독립당 선전부장에 취임하였으며, 1946년 2월 1일 개최된 비상국민회의에서 선전위원장이 되었다. 1947년 3월 1일 국민의회 전국대표자대회의 임시정부확대강화에 따른 정무위원 개편에서도 정무위원이 되어 선전부장으로 임명되었다.
1948년 남북협상에는 4월 20일 한국독립당 대표단 5명과 함께 참가하여 전조선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에 이어 개최된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 속칭 남북요인회담에 참가한 15명의 한 사람으로 4월 30일 공동성명 기초에 참여하였다.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피살될 때까지 그를 보좌하다가 6, 25 때 납북되었다.
이후 엄항섭 등 재북(在北) 인사들은 1954년 제네바 회담의 개최를 계기로 자신들의 통일 방안을 설명하기 위해 북측 대표 외에 자신들의 대표단 파견을 북측 당국에 요구하였다. 그 결과 엄항섭과 권태양이 대표로 선발되어 모스크바로 파견되었으나 스위스 당국의 비자 발급 거부로 평양으로 되돌아왔다.
1955년 11월 12일 엄항섭은 오하영·윤기섭·조소앙·송호성·안재홍과 더불어 6인 공동 성명을 발표했는데, 이 성명은 “남반부의 정사·군사·경제·문화 각계각층 지도자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으로 “해방 10주년 경축대회에서 제기된 통일 방안을 지지하고, 남북협상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그 실천 노력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내용은 이들 6인의 본의와는 달리 왜곡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1956년 7월 2~3일 열린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결성대회에서 주석단의 1인으로 참석하여 상무위원 11인과 집행위원 29인 중 1인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1958년 ‘반당·반혁명 행위’ 혐의로 체포되었다.
1962년 7월 30일 평양에서 지병으로 사망했으며, 북한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묻혀있다.
그의 부인 연미당(延薇堂)도 만주 북간도에서 태어나 한국 독립운동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용정(龍井)과 상해(上海)에서 활동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3, 1운동에 가담하였다가 192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항저우(抗州)에서 지장대학(芝江大學)을 졸업하였다. 상해(上海)로 돌아와서 언론계에서 활동하다가 1929년부터는 청년운동에 참여하여 재중국한인청년동맹 중앙위원이 되었으며, 1931년에는 안창호(安昌浩), 선우 혁(鮮于赫), 차이석(車利錫)과 같이 자활자위를 목적으로 하는 공평사운동(公平社運動)에도 참여하였다.
1932년에는 임시의정원 의원에 취임하여 김구(金九)를 보좌하여 한국독립당 선전부장을 맡았다. 1942년에는 임시의정원 외무분과위원장에 취임하였으며, 1944년에는 임시정부 선전부장에 취임하였다. 1945년 11월 23일 임정요인의 제1진으로 환국하여 경교장(京橋莊)을 중심으로 조완구(趙琬九)와 함께 김구의 유일한 측근으로 김구를 보좌하였으며, 문장에 뛰어나서 김구 명의로 발표하는 모든 성명이나 국민에게 발표하는 호소문을 거의 기초하였다.
환국하여 계속 한국독립당 선전부장에 취임하였으며, 1946년 2월 1일 개최된 비상국민회의에서 선전위원장이 되었다. 1947년 3월 1일 국민의회 전국대표자대회의 임시정부확대강화에 따른 정무위원 개편에서도 정무위원이 되어 선전부장으로 임명되었다.
1948년 남북협상에는 4월 20일 한국독립당 대표단 5명과 함께 참가하여 전조선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에 이어 개최된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 속칭 남북요인회담에 참가한 15명의 한 사람으로 4월 30일 공동성명 기초에 참여하였다.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피살될 때까지 그를 보좌하다가 6, 25 때 납북되었다.
이후 엄항섭 등 재북(在北) 인사들은 1954년 제네바 회담의 개최를 계기로 자신들의 통일 방안을 설명하기 위해 북측 대표 외에 자신들의 대표단 파견을 북측 당국에 요구하였다. 그 결과 엄항섭과 권태양이 대표로 선발되어 모스크바로 파견되었으나 스위스 당국의 비자 발급 거부로 평양으로 되돌아왔다.
1955년 11월 12일 엄항섭은 오하영·윤기섭·조소앙·송호성·안재홍과 더불어 6인 공동 성명을 발표했는데, 이 성명은 “남반부의 정사·군사·경제·문화 각계각층 지도자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으로 “해방 10주년 경축대회에서 제기된 통일 방안을 지지하고, 남북협상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그 실천 노력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내용은 이들 6인의 본의와는 달리 왜곡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1956년 7월 2~3일 열린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결성대회에서 주석단의 1인으로 참석하여 상무위원 11인과 집행위원 29인 중 1인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1958년 ‘반당·반혁명 행위’ 혐의로 체포되었다.
1962년 7월 30일 평양에서 지병으로 사망했으며, 북한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묻혀있다.
그의 부인 연미당(延薇堂)도 만주 북간도에서 태어나 한국 독립운동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용정(龍井)과 상해(上海)에서 활동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