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말의 법률가, 일제강점기의 관료. 호는 반아(槃阿). 경기도 광주(廣州) 출신. 독학하다가 22세 때 일본으로 유학, 동경의 화불법률학교(和佛法律學校: 지금의 法政大 전신)에 입학하여 3년간 수업하고 1902년 졸업하였다. 그뒤 곧 귀국하여 1904년 11월말경에 군부 군법국 주사로 근무하였으며, 1905년에는 법률기초위원으로 임명되었는데, 당시 이토(伊藤博文)의 법률고문 겸 입법조사사업을 진두지휘하던 동경대학 민법교수 우메(梅謙次郞)의 통역을 맡았다. 그 해 말경에 법관양성소(法官養成所) 교관으로 임명되어 채권법(債權法)과 국제공법(國際公法)을 강의하였다. 1906년 6월에는 내부 참서관(參書官)으로 임명되었고, 이어 7월에는 의정부의 부동산조사위원회의 위원으로 피선되었다. 한편으로 경성법학전수학교(京城法學專修學校)에서 강의도 하였다. 1911년에는 충청남도 예산에 호서은행(湖西銀行)을 설립하는 일에 관여하여 취체역이 되었고, 그뒤 조선직조회사, 조선방직회사, 조선제지회사 등의 전무 또는 지배인을 지냈다. 1921년에는 전라남도 청 참여관(參與官)으로 부임한 뒤 1924년에는 충청남도 도지사로 임명되었는데, 당시에 발간된 '조선시정15년사 朝鮮始政拾五年史'에는 '웅변에 능하고 활동적인 정력가이며, 술, 담배도 않고 신지식과 신사조에 관심을 두는 인물'이라고 논평되었다. 1926년에는 전라남도 도지사로 전임되고 그해 있었던 쇼와(昭和)의 대관식에도 참석하였다. 그러나 외면적인 친일의 이면에는 일본인과 마찰과 불화도 있었고, 1929년에는 마침내 8년간의 관료생활을 청산하고 사표를 내었다. 총독 사이토(齋藤實)는 석진형의 청빈함을 알고 그뒤에도 가끔 사가(私家)로 찾아가 서예와 바둑으로 유유자적하는 모습을 보고갔다. 한동안 동양척식주식회사의 감사역을 맡았으나 바로 그만두고, 광복 후에는 강원도 가곡(佳谷)에 있는 농장에서 지냈다. 저서로는 '평시국제공법론 平時國際公法論'(1907), '채권법 債權法'(1908)이 있으며 한시집도 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