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말의 의병장. 자는 충서(忠瑞). 호는 중호(中虎). 경상북도 청송 출신. 효수(孝洙)의 아들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일제에 대항하여 거의를 결심하고 김재서(金在瑞) 등과 의병을 조직하여 동해창의대장(東海倡義大將)에 추대되어 청하, 영덕 등지에서 일본군 주재소를 습격하여 큰 피해를 주었다. 1907년 정용기(鄭鏞基)를 중심으로 의병진을 결성하기 위하여 각 지방별로 계획을 추진하는 담당자를 선정할 때, 서종락(徐鍾洛) 등과 청송 지역을 맡아 산남의진 성립에 기여하였다. 그해 4월 산남의진은 청하읍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정용기가 투옥되고 전력이 약화되어 7월경 해산되었으나, 이듬해 4월 다시 의진이 창군되자 동해지구 유격장에 임명되어 청송, 영천 등지에서 항쟁하였다. 그해 7월 산남의진이 동해방면으로 진출할 때 본진에 합류, 좌포장이 되었다. 9월 영일군 죽장면전투에서 정용기가 전사하자 그의 아버지 환직(煥直)을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200여신병을 이끌고 청도 운문산(雲門山)에 들어가 훈련시켰으며, 1908년 봄에는 운문산을 근거지로 경주, 언양, 양산, 밀양, 영산, 창녕 등지의 적을 격파하였다. 그해 6월 일본군에 붙잡혀 징역 3년을 선고받았으나 10개월 만에 석방되어 1910년 4월에 옛 동지들을 다시 규합하여 보현산에서 산남의진을 재결성, 대장이 되어 청송, 의성 등지에서 적과 교전하다가 다시 붙잡혀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