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말의 의병장, 독립운동가. 일명 주성(周成). 자는 선명(宣明). 호는 성파(惺波). 논산에서 출생, 강원도 고성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인규(仁圭)이며, 장남 기수(基洙)와 더불어 3대가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1906년에는 강릉 유림대표로 선정되어 성균관에 진정서를 올리고, 대동문우회(大同文友會) 및 법부평의회에 고소하여 친일 군수인 이재화(李載和), 친일 거부인 이근우(李根宇), 조익환(曺翊煥) 등에게 추방명령을 내리도록 종용하였다. 1907년 군대해산령을 듣고 의거할 것을 결심, 은밀하게 원주병영에 가서 특무정교(特務正校) 민긍호(閔肯鎬), 의무도통(義務都統) 이중희(李重熙) 및 지휘관 김덕제(金悳濟) 등과 항일구국활동을 전개할 것을 모의하고 의병부대를 결성, 무기고에서 소총 1천6백여자루와 탄환 4만여발을 탈취하여 무력투쟁을 위한 준비를 갖추었다. 이어 의병소모장(義兵召募將)이 되어 의병 및 해산군을 모으는 한편, 인제의 운두령(雲頭嶺)에서 왜병을 대파하였다. 1908년 2월, 의병을 통솔하고 이강년(李康秊) 부대와 합진하여 백담사전투(百潭寺戰鬪)에서 왜병을 크게 격파하고, 5월 강원도 정선 북면 단림(丹林)에서 왜군과 교전, 8백명을 전멸시켰다. 6월, 왜병이 그의 본가에 침입하여 어머니 김씨와 둘째아들인 증수(曾洙)를 구타하고 가옥을 전부 불태웠다. 1913년 서울의 김종익(金鍾翊)과 함께 의군부(義軍府)를 조직하고 유격장에 임명되어 의거를 준비하던 중 강원도 명주군 사천면 장재호(張在鎬)의 집에서 붙잡혔다. 10년형을 언도받고 6년간 옥고를 치른 후 출감하였다. 1919년 3, 1운동이 일어나자 다시 강원도, 충청도 지방을 잠행하며 무력항일투쟁의 재개를 도모하다가 다시 붙잡혀 무기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르던 중 4년 만에 옥사하였다. 1977년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