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말의 의병. 자는 성채(成彩). 호는 의암(毅庵). 전라남도 장성 출신. 아버지는 영철(英澈). 의병활동 당시에는 성채 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면서 국운이 날로 기울어가자 1906년 전라남도 영광에서 김준(金準), 전수용(全垂鏞) 등과 밀회를 거듭하면서 거의(擧義)를 준비하였다. 그리하여 1907년 3월 장성군 삼서면 일대에서 동지 1백여명을 규합하여 의거의 기치를 올렸다. 정미칠조약이 강제체결되고 군대마저 해산되자 호남 지방에서 고광순(高光洵), 기삼연(奇參衍) 의진이 크게 활약하였으나, 이들 의병장들은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가기 전에 적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붙잡혔다. 그리하여 전라도 지방에서는 김준, 오성술(吳聖述), 전수용 등에 의하여 의병활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는데, 이 무렵 영광, 장성 등지에서 왜군과 교전하여 일본군 수십명을 살상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 그뒤 김준과 전수용의 의진을 여러 차례 방문하여 의병활동의 효과적인 전개방향을 모색하였다. 1908년 2월 의병장 기우만(奇宇萬)이 순국하고 4월 김준 마저 전사하자, 호남의진은 대체로 조경환(曺京煥)과 전수용의 의진으로 갈려서 독자적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이때 정원집(鄭元執)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남하하여 전수용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함으로써 7월 8일 김찬순은 부하 1백여명을 거느리고 연합의진에 합세, 그 의진의 도통장(都統將)이 되었다. 이대국(李大局) 의진의 총독장(總督將) 채경윤(蔡景允)을 연합의진의 간부로서 추천할 뿐 아니라, 이대국과 김유성(金惟成) 의진 등과 연합 내지 합진할 것을 권유하기도 하였다. 8월 12일 오후 영광읍 성내리에 진을 치고 왜병과 교전하다가 삼서면 대곡리에 은신하였는데, 8월 30일경 삼서면 금강천변에서 왜군 20여명에 포위당하여 교전하던 중 붙잡혀 사살되었다고 전한다. 1980년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