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말의 의병, 독립운동가. 일명 정래(淨來). 경상북도 문경 출신. 참봉을 지냈다. 1907년 9월 이강년(李康○) 의진(義陣)의 참모로 임명되어 활발한 의병투쟁을 하였다. 그리고 의진이 노고성(老姑城)에 주둔할 때 좌익장(左翼將) 김영식(金永軾)과 함께 정예의병 20여명을 이끌고 이화령(梨花嶺)을 파수하기도 하였다. 1908년 이강년 의진의 참모장이 되어 경상북도, 충청북도, 강원도 등지에서 활동하였으며, 이해 6월 이강년 의병장이 까치성에서 부상, 피체되자 일시 강원도 영월에 피신해 있다가 의병투쟁을 계속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권병을(權秉乙), 김성추(金聲秋), 조용필(趙鏞弼)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4년 9월 귀국한 뒤 옛 의병동지인 이은영(李殷榮), 김낙문(金洛文), 최욱영(崔旭永), 이제재(李提宰)와 새로운 독립운동조직 결성을 논의하였다. 그 결과 1915년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민단조합(民團組合)을 결성하여 충청남도 지부장이 되어 격문을 배포하고 군자금을 모금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는데, 1916년 8월 경상북도 예천의 박심수(朴尋洙), 안동의 김숙헌(金叔憲) 등으로부터 군자금을 받은 것이 그것이다. 앞서 1915년 경상남도 하동군 하동면의 김병두(金炳斗), 병천리의 박종식(朴宗湜),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금계리의 이종면(李鍾冕) 등을 항일지하조직인 조선독립의군부에 동참하도록 하였는데, 1915년 4월 박종식이 군자금 250원을 가지고 충청남도 성환역에서 잡히자 위험을 느껴 피신하였으나, 1916년 8월 잡혀 1918년 5월 30일 공주지방법원으로부터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복역중 청주감옥에서 일본경찰로부터 모진 고문을 받아 의식불명상태가 되었다. 가족에게 인계되었으나 들것에 실려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소리구재에서 순국하였다. 1986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