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최사위(崔士威)
  • 수원최씨(水原崔氏),  출생~사망 : 961 ~ 1041
고려 전기의 재상. 증조부 서천(徐遷, 書遷)은 호장(戶長) 이었고, 할아버지인 한용(韓用)과 아버지 융예(融乂, 融藝, 融銳)는 상경출사(上京出仕)하였으나 미관에 머물렀으며, 어머니는 김해부 아간(金海府阿干) 유울행(庾鬱行)의 딸이다. 이후 자손들이 잇따라 고관에 오름으로써 고려 전기의 대표적인 문벌귀족으로 번성하다가 무신의 난을 계기로 몰락하였다. 과거를 통하여 벼슬길에 오른듯하며, 목종 때 이미 시어사(侍御史), 호부시랑 등을 거쳐 형부상서의 지위에 올라 있었다. 1009년(목종 12)에 김치양(金致陽)이 난을 일으켜 목종을 폐하려 하였을 때, 대정문별감(大定門別監)에 임명되어 궁문을 폐쇄하고 국왕을 호위하였다. 1010년(현종 1)에 거란이 침입하여오자 통군사(統軍使)로서 통주(通州: 지금의 宣川)에서 거란군을 방어하였으나 패배하였다. 다음해에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승진하였으며,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와 서경유수를 거친 다음 이부상서로 옮겼다. 1012년에는 동경유수를 없애고, 경주방어사(慶州防禦使)를 둘 것과 12주(州)의 절도사를 5도호(都護), 75도안무사(道安撫使)로 대체할 것을 건의하여 실행하게 하였으며, 곧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와 문하시랑평장사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019년에 추충좌리동덕공신 청하현개국남(推忠佐理同德功臣淸河縣開國男)으로 봉하여졌고, 1021년에는 광국공신(匡國功臣)이 더하여지고 개국백(開國伯)으로 작진(爵進)되었으며, 관직도 검교태사 수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檢校太師守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에 올라 총재(○宰)가 되었다. 이때 주현의 장리(長吏)칭호를 정리하여 군, 현 이상에서는 호장 으로, 향(鄕), 부곡(部曲), 진(津), 정(亭), 역(驛) 등에서는 장(長)으로 부르도록 하였으며, 거란의 동경장군(東京將軍) 대연림(大延琳)이 반란을 일으켜 흥료국(興遼國)을 세우고 고려에 도움을 청하였을 때에는 국방을 강화하면서 사태를 관망하자는 신중한 태도를 취하였다. 1027년에 태자태사(太子太師)를 겸하였으며, 1031년 내사령(內史令)으로 치사(致仕)한 뒤 1041년(정종 7)에 죽었다. 1052년(문종 6) 현종묘정(顯宗廟庭)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정숙(貞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