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기에 태어나 조선 초기에 활약한 문인, 서예가. 자는 백원(百源). 호는 월곡(月谷). 판사 일(壹)의 아들이다. 1411년(태종 11) 식년문과에 급제하였고, 1414년 승문원교리로 있을 때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 하륜(河崙)의 비위에 거슬려 파직당하였다. 이후 재등용되었으나 1420년(세종 2) 인녕부판관(仁寧府判官)에서 또다시 삭직되었다. 이듬해 우헌납으로 복직되고 이어 예문관직제학을 지냈다. 조선 초기 서예가 중에서 뛰어난 인물로 예서와 조맹부체(趙孟○體)의 초서를 잘 썼다고 한다. 조신(曺伸)의 '소문쇄록 ○聞○錄'에 ' 최흥효의 초서와 안평대군의 행서가 일세에 성행되었다. ' 하였고, '중종실록' 권83에서도 우리나라의 조맹부체로 안평대군과 함께 최흥효, 박경(朴耕)을 대표로 든 것을 보면 그의 명성을 알 수 있다. 또한 '세종실록' 권33에도 태종이 죽자 선왕의 명복을 위하여 유계문(柳季聞), 안지(安止), 최흥효에게 '금자법화경 金字法華經'을 쓰게 하였다 한다. 금석으로 강릉의 '최참판치운비 崔參判致雲碑'가 있다. '근묵 槿墨' 등에 그의 전적이 약간 전하며, '관란정첩 觀瀾亭帖', '대동서법 大東書法' 등에 필적이 모각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