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 조선 초의 은사(隱士). 자는 자정(子正). 호는 운곡(耘谷). 고려말에 정용별장(精勇別將)을 지낸 열(悅)의 손자이며, 종부시령(宗簿寺令)을 지낸 윤적(允迪)의 아들로 원주원씨의 중시조이다. 어릴 때부터 재명(才名)이 있었으며, 문장이 여유있고 학문이 해박하여 진사가 되었으나 고려 말의 정치가 문란함을 보고 개탄하면서 치악산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봉양하고 살았다. 일찍이 방원(芳遠: 太宗)을 왕자 시절에 가르친 바 있어 그가 즉위하자 기용하려고 자주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으며, 태종이 그의 집을 찾아갔으나 미리 소문을 듣고는 산속으로 피해버렸다. 왕은 계석(溪石)에 올라 집 지키는 할머니를 불러 선물을 후히 주고 돌아가 아들 형(泂)을 기천(基川: 지금의 豊基) 현감으로 임명하였는데, 후세사람들이 그 바위를 태종대(太宗臺)라 하였고 지금도 치악산 각림사(覺林寺)곁에 있다. 그가 치악산에 은거하면서 끝내 출사하지 않은 것은 고려왕조에 대한 충의심 때문이었던 것을 그가 남긴 몇 편의 시문과 시조를 통하여 엿볼 수 있다. 시조로는 망한 고려왕조를 회고한 것으로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로다. 오백년 왕업이 목적에 부쳤으니, 석양에 지나는 객(客)이 눈물겨워하노라. '라는 회고시 1수가 전해오며, 시문들은 뒤에 '운곡시사 耘谷詩史' 라는 문집으로 모아져 전해온다. 그 문집에 실려 있는 시 중에는 고려의 쇠망을 애석하게 여기는 몇 편의 시문이 전해오는데, 대표적인 시의 제목을 보면, 우리나라 2현(賢)을 기리는 시문 중에 최영(崔瑩)을 기리어 '전총재육도도통사최영 前○宰六道都統使崔瑩'이라는 시와 우왕과 창왕을 중 신돈(辛旽)의 자손이라 하여 폐위시켜 서인을 만든 사실에 대한 '왕부자이위신돈자손폐위서인 王父子以爲辛旽子孫廢位庶人'이라는 시를 읊어, 만일 왕씨(王氏)의 혈통으로 참과 거짓이 문제된다면 왜 일찍부터 분간하지 않았던가고 힐문하면서 저 하늘의 감계(鑑戒)가 밝게 비추리라고 말하였다. 그는 또 만년에 야사 6권을 저술하고 '이 책을 가묘에 감추어두고 잘 지키도록 하라.'고 자손들에게 유언하였으나 증손대에 이르러 국사와 저촉되는 점이 많아 화가 두려워 불살라버렸다고 한다. 강원도 횡성의 칠봉서원(七峯書院)에 제향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