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복구(復丘)
  • 고성이씨(固城李氏),  출생~사망 : 1270 ~ 1355
고려시대의 승려. 수선사(修禪社) 16국사 중 제13세국사. 성은 이씨(李氏). 호는 무능수(無能○) 또는 무언수(無言○). 고성(固城) 사람이다. 부친은 충렬왕 때의 문관인 존비(尊庇)이다. 어려서부터 자질이 맑아 불법(佛法)을 존경하였고 놀 때도 불가(佛家)의 규칙을 본떴다고 한다. 10세 때에 조계산(曹溪山)의 천영(天英) 밑에서 출가하고 구족계를 받았으나, 천영이 입적하자 수선사 제12세 자각국사(慈覺國師) 도영(道英)을 좇아 공부하였다. 21세 때 선선상상과(禪選上上科)에 합격하였으나 산림 속에 머물러 명리에 초연하였다. 도영이 그를 지극한 예로써 대우하고 학도들을 맡기려 하였으나, 그는 '얻은 바 있은 뒤라야 남에게 전할 수 있는 것인데 진실로 감당할 수 없다. ' 하고, 백암사(白巖寺)로 옮겨가서 10여년 동안 참구(參究)하였다. 그뒤 월남사(月南寺), 수선사 등에 40여년을 머물면서 중생제도와 국태민안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충정왕의 왕사(王師)가 되어 각엄존자(覺儼尊者) 라는 호를 받았고, 또 1352년(공민왕 1)에는 공민왕 으로부터 왕사의 책을 받았다. 이때 왕명에 의하여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사(佛岬寺)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왕은 그의 연령과 건강을 염려하여 그의 초상화를 그려서 예를 거행할 정도로 지극한 정성과 존경으로 섬겼다. 1355년에 불갑사로부터 백암사로 옮겨 거처하다가 그해 7월 27일에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입적하였다. 문인으로는 선원(禪源), 백화(白華), 가지(迦智), 마곡(麻谷) 등 1000여인이 있다. 국사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각진(覺眞), 탑호는 자운(慈雲)이다. 1359년 칙명에 의하여 이달충(李達衷)이 비명(碑銘)을 짓고 이제현(李齊賢)의 글씨를 써서 불갑사에 비가 세워졌다.